참고자료      교황바오로2세의 노동헌장

                  인간화(人間化)의 길
(인간은 노동하면서 행복하게 성숙하도록 창조된 존재이다)

인간은 노동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확인하며 성장.성숙하고 이웃과 연대하며 봉사하기 때문에 인간다운 삶을 영위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나 노동할 의무와 권리를 갖는다.1)

노동은 넓은 의미로는 인간의 활동, 특히 직업적 활동을 모두 포괄하며 좁은 의미로는 생산적 활동을 지 칭한다. 생산적 활동이라고 하더라도 그 의미는 다양하다. 농어촌의 문화 권에서 생활하는 사람의 노동형태와 고도의 산업 시설을 통한 생산직에서 노동하는 것은 아주 다르다. 그러나 어떠한 문화권 하에서의 노동이든 다같은 인간의 활동이며 인격과 직결되는 것으로서 인간의 존엄성과 직결된다.

노동이 단순히 생산의 목표와 도구가 되어 노동하는 인간이 무시되거나 2) 노등의 가치와 등급을 자본적 가치에만 기초를 두고 그를 인간의 가치와 계급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부당하며3) 늘 인권침해를 동반하는 것으로 인간도 노동도 옳게 평가받지 못하게 된다.

노동과 인간을 노동하는 인간이라는 인식 하에 관찰하여야 하며 노동 윤리와 인간 윤리는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와 같은 인식이 사회의 인간화를 위하여도 중요한 계기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본고에서는 노동에 대한 신학적 이해와 이를 근거로 한 노동 윤리의 기초를 다루어 보고자 한다.

Ⅰ. 노동의 의미

노동은 인관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단지 경제적 차원의 대상으로만이 아니고 인간과의 근원적 의미를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수렵 사회나 농경 사회에서 인간의 노동이 있었다면 산업 사회, 후기산업 사회에서도 인간의 노동은 있게 마련이다. 인간이 자기의 노동에 대하여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임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회의 인간화는 결정되겠기 때문이다.4) 일하는 것과 쉬는 것을 분리하여 인간 사회를 자유인과 노예의 신분으로 구별하고 노동과 자본을 분리하여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데올로기를 창출하고 비인간화된 산업사회를 만든것은 결국 인간 이해도 노동의 의미도 왜곡한 데서 온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교회 내에서도 노동을 단지 죄의 결과이며 벌이라는 정도로 평가절하하여 온 것은 성서에 대한 폭넓은 이해난 신학적 반성이 부족하였던 데 기인한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창조와 육화와 완성에 대한 신학적 반성이 활발해지며 현세질서와 의미에 대한 새로운 비판과 평가가 많이 나타났다.5) 이로 인하여 노동에 대한 이해도 새롭게 깊이 다루게 되었다.

    1. 인간 노동의 성서적 이해

현대적 의미의 "노동"이란 단어는 성서 안에 사용되지 않았다. 그 시대에는 아직 산업화 과정에서 나타난 자본과 노동 등의 구별이 없었으며 성서 자체도 천년 이상 경과하며 형성된 책으로서 단어의 활용이 시대와 문화적 배경에 따라 다양하고 상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서의 노동에 대한 고유한 이해가 있었으므로 용어와 의미를 구분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가) 성서가 사용한 용어들

성서는 기록된 시기와 문화권에 따라 다양한 이해와 표현들을 하고 있다. 성서에는 농경사회에서 사람들이 활동하는 일들, 집 짓고 길쌈하고 농사짓고 하는 일 등 의식주와 관계되는 활동에 대한 용어라든지 공예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는 석조나 목공예, 연금술 등 다양한 노동 일들을 포함하는 단어들이 있다. 또 일을 하는 데 있어 일반적 활동과 고된 일이 구분되어 사용됨을 알 수 있다.6) 의무적으로 하거나 노예 노동과 같이 인간의 자유 선택에서가 아니고 부과된 일들도 많았다. 같은 일이라도 신분과 환경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졌던 것을 우리는 쉽계 구별할 수 있다.

 나) 성서의 노동관

성서가 인간의 노동을 이해하는 데 있어 인근 문화와 구별되는 고유의 가치관은 인간의 일과 활동을 모두 하느님과의 관련 안에서 본 점이다. 이것이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고유한 노동관이라고도 할 수 있다.

첫째, 창조 질서 안에서의 노동관

"야훼 하느님께서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때였다. 땅에는 아직 아무 나무도 없었고, 풀도 돋아나지 않았다. 야훼 하느님께서 아직 땅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고 땅을 갈( ) 사람도 아직 없었던 것이다"(창세 2,5)라는 표현에서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시어 그들에게 고유사명을 주신다. 다른 피조물들과는 구별되는 사명을 주시는 것이다. 제관계 창조설화에서는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따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 의 새와 땅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창세 1,28) 하였고, 야휘스트 전승에서는 "야훼 하느님께서는 아담을 데려다가 에덴에 있는 이동산을 돌보게 하셨다."(창세 2,15)라고 하였다. 시대적 배경과 문화적 여건이 다른 제관계 전승과 야휘스트 전승이 의미상 같은 내용을 전달하는 것은 공통된 기본 정신이 이스라엘의 신앙 안에 들어 있음을 알려준다.

하느님의 말씀으로서의 계시는 조심스럽고 경건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성서가 인간의 노동에 대하여 시사하는 기본 정신이 여기에서 잘 엿보인다. 창세기 1장과 2장에 나타나는 사상은 인간이 하느님을 닮은 존재와 그의 생명에 동참하는 자라는 점과 그를 대신하여 세상의 모든 것을 다스리는 인간은 피조물에 속하면서 동시에 모든 피조물을 초월하여 하느님의 위임을 받아 세상을 "정복하고" "부리고" "돌보는" 존재임이 드러난다.7) 그리고 마침내 주님의 안식에 이르는 것이다. "하시던 일을 다 마치시고 이렛날에는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창세 2,2). 이는 노동의 완성을 의미하며 진정한 쉼에 대한 여유로, 그리스도교의 특성이었다.8)

 둘째, 구원질서 안에서의 노동관

인간이 하느님의 특벼란 배려로 만물의 영장으로서 하느님의 위임을 받아 세상을 돌볼 위치에 놓여 있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의 초대였다. 인간이 피조물임을 즉 죽을 수 있는 존재임을 알았여야 했다. 이는 인간이 피조물로서의 한계성을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뜻에 순응해야 하는 조건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했어야 했다. 불행하게도 인간은 자기의 자율성을 상실하였다. 자기의 자율이 "위임권"임을 망각하고 착각했다.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받들지 않을 때 하느님도 그를 돌보지 않으신다. 인간 범죄의 결과는 곧 인간의 자기 위치의 상실이었다. 인간은 자기가 받았던 품위와 능력을 잃고 초라하고 가련한 존재가 되었다.

모든 질서와 조화가 깃들던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었다. 야훼 하느님은 이들을 "에덴 동산에서 내쫓으시었다. 그리고 땅에서 나왔으므로 땅을 갈아 농사를 짓게 하셨다( )". 이렇게 아담을 쫓아내신 다음 하느님은 동쪽에 거룹들을 세우시고 돌아가는 불칼을 장치하여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목을 지키게 하시었다( ). 인간이 일을해야 하는 것은 변하지 않았으나 노동의 조건이 변하였다.

에덴에서 추방된 인간의 상황은 형제간의 살상(창세 4,1-16).성(性) 질서의 문란(창세 6,1-4), 허황된 야먕으로 세상의 질서와 조화의 파괴(창세11,1-9)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렇게 개관하여 볼 때 성서의 노동관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셋째, 하느님의 일과 인간의 일

인간의 노동이란 그 자체로서는 어떤 가치나 의미가 결정되지 않고 창조주가 세워 놓으신 의미와 목적에 부합되는지 여부에 따라 옳고 그른 성격과 가치로 결정된다. 성서는 이것을 하느님의 일과 인간의 일로 구분하여 표현하고 있다. 11)

1) 하느님의 일: "내 아버지께서 언제나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라는 표현대로 하느님은 일하시고 일하신 결과를 남기신다. 하느님의 일과 그 결과는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그 한 가지는 창조주로서 생명을 주시고 그를 지켜 주시는 것이다. 인간이 범죄하여 죽게되었어도 그들을 찾아 주시고 지켜 주셨다. 창세기 3장과 4장의 내용도 벌하시는 하느님보다 삶으로 인도하시는 하느님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하며 배반자를 찾아오신 하느님은 "가죽옷을 만들어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입혀 주셨고"(창세 3,21)"네 아우 아벨 어디 있느냐"고 살인자를 찾아내어 추궁하시는 하느님이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카인에게 "그렇게 못하도록 하여 주마. 카인을 죽이는 사람에게는 내가 일곱 갑절로 벌을 내리리라"(창세 4,15)하시며 살 길을 마련하신다.

하느님의 일은 "너의 백성은 모두 올바르게 살아 영원히 땅을 차지하리라. 너의 백성은 내가 심은 나무에서 돋은 햇순이요, 내가 손수 만든 나의 자랑거리다"(이사 60,21)라고 하는 보존과 구원의 길이다. 언제나 그분의 생각과 계획은 인간이 잘되도록 하시는 것이다.(예레 29,10). 하느님은 하시는 일마다 위대하시고 완전하시다.12) 하느님 계획의 목표는 인간의 구원이다. 이는 신약성서 안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하느님의 업적은 죽을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이고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룩하신 인류구원의 표징들이다.13)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구세주의 일은 아버지의 뜻만을 따르는 일이며14)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성취되는 것이었다. 15)

2) 인간의 일: 인간이 창조주이시고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뜻을 따라 행하면 그의 일은 의미있는 것으로 하느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이며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것으로 평가된다. 16) 반대로 하느님의 뜻을 벗어난 행위들은 무의미하고 죄스런 행동들로서 불행의 근원이 된다. 17) 특히 요한계 문헌과 바울로 사도의 서간들에서 표현하는 "세속" "인간의 일" 등은 "하느님의 일"에 상치되는 것들이며 인간 구원에 방해되는 것을 의미한다. 18)

3) 인간적 노동: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인간의 활동이나 노력들은 그 자체로 중립적이라 할 수 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인간의 노동이 죄의 벌이라든지 나쁜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문화적, 사회적 여건에서 즉 이집트에서의 억압과 노역이라든지 노예제도의 문화안에서 노예들을 혹사하는 것과 같은 상황은 일 자체보다 당시의 문화적 배경과 사회의 연관성에서 나타나는 표현들로서 노동의 고역을 죄의 벌로 까지 연결시킨 것이다. 창세기 3장 17절의 "땅 또한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 살리사" 에서는 히브리어의 "??????"를 "???"로 잘못 해독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19) "하느님이 인간에 게 축복과 권위로 주신 일과 노동은 인간의 배신과 타락으로 인하여 저주로 변하였거나 자기 성취의 즐거운 사건이 아니고 먹고 살기 위한, 그리고 억지로 부과된 고통의 멍에에 불과한 것이다"라고 해석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고 죄의 벌에 대한 확대 해석으로 보아야 하겠다.20)

인간의 노동이 저주받은 것이 아니고 인간들의 죄스런 상황과 억압적 노동이 인간을 비인간화하고 인간을 소외시킴으로써 노동하는 인간이 불행하게 되는 것이다.21)

    2. 신학적 이해

가) 인간은 노동하면서 성장.성숙하도록 창조된 존재이다

노동의 개념이 다양하고 인간의 삶 전체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노동윤리를 언급하기 위해서는 임의로 노동의 개념을 축소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왜냐하면 인위적으로 축소시킬 때 무리가 오고 다원 사회에 있어 일방적이고 부분적인 내용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성서적 고찰에서 보았듯이 인간은 하느님께로부터 일할수 있도록 창조되었고 세상을지배하고 보존하라는 사명을 받았다.그러므로 인간이죄를 짓지 않았더라도 일을 했어야 할 것이고 노동을 통해 재화의 취득과 인생의 성취감을 맛보았을 것이다. 노동은 인간의 기본 소명이다. 인간의 실존과 노동을 분리하여 노동을 죄의 벌로 생각하는 것은 아담의 범죄와 그 벌에 대하여 지나치게 단순한 해석을 하는 것이고 노동을 기피하는 생각이다.

인류는 대부분 계급 사회와 노예제도를 유지했었고 이러한 상황을 기준으로 신분과 노동을 결부시키는 잘봇을 범했다.22) 인간의 노력을 기계가 대행하게 되어 인간이 노동에서 해방되었다고 곧 행복은 아니다.23)

노동은 인간관계와 본인이 노동에 임하는 자세로 성격도 드러난다. 부모들이 자녀들을 위하여 수고하는 의미와 기쁨은 타인에 예속되어 억지로 하게 되는 일과 대조할 때 일의 성격 자체는 비슷할지 몰라도 실제로 일하는 각자에게 큰 차이가 있게 된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서나 건강을 위해서 활동을 해야 하지만 시대와 사회의 변화에 따라 일하는 모습도 성격도 다양해진다. 그러나 각자는 자기의 처지와 능력에 따라 자신만이 아니고 이웃을 위해서도 일을 해야 한다.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는 격언은 동서고금 어느 사회나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덕목이다.24) 노동은 인간의 활동으로 인격적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 마치 전기가 발전기와 독립되어 따로 존재하지 않듯이 "노동"은 독립하여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다.25) 여기서 노동의 가치와 품위도 이해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품위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나) 노동은 자연 안에서 자연과의 관련 안에서 행사되는 것으로 창조질서에 순응해야 한다.

창조의 질서에 순응해야 한다는 것은 필연적이며 동시에 당위에 속한다. 필연적 이유는 인간의 현세적 조건과 육제를 떠나서 있을 수 없으며 육체는 자연 질서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에게는 피조물 중에서 특별히 하느님을 닮은 존재로서 다른 자연물을 다스리고 돌볼 의무가 있다. 자연을 올바로 다루려면 자연을 알아야 하므로 물리 (物理)와 생리(生理)등의 자연과학적 지식을 동반하게 된다. 또 자연을 기르고 보호하고 육성해야 한다. 총체적이고도 포괄적이지 않고 부분적 진리와 인간 중심의 욕망으로 자연을 개발한다는 것이 얼마나 자연을 훼손하고 생태계에 피해를 입히고 있는지 현대에 와서 더욱 확실히 드러나고 있다. 인간의 자연 수탈은 지하자원의 고갈뿐 아니라 인간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기에 이르렀음을 알게 되었다.26) 그러므로 누구나 노동은 해야 하지만 하느님의 뜻에 따르지 않을 때 자기 모순이며 배반이며 헛수고임을 알아야 한다.27) 자연에 내포된 이 질서를 지키지 않는 인간의 일이란 죄가 되는 것이며 죄는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한 폭력이고 파괴임을 알아야 한다.28)

다) 인간 소외가 노동의 소외를 가져왔다.

하느님 앞에 모든 인간은 동등하다. 각자의 활동하는 일로 인하여 차등 대우나 평가를 받아서는 안 될 일이다. 구약성서에 보면 인간의 다양한 직업 활동들을 열거하고 귀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으며 의미있는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29) 신약성서 안에서도 직업의 귀천이나 차등 평가는 없다. 인간의 일이나 노력은 그 자체로는 의미가 큰 것이 아니고 그 일을 하는 사람의 자세가 중요한 것으로 드러난다. 바울로 사도는 자기의 천막만드는 직업에 긍지를 가지고 있었으며 신자들이 자기의 직업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30) 예수님 자신도 목수 일을 하신 것으로 알려져 있다.31) 한마디로 인간은 누구나 일하도록 불렸고 일하는 것은 소중한 것이라고 성서는 가르치고 있음을 볼 수 있다.32) 세상을 지배하고 볼살피고 가꾸는 일은 인간의 사명이다. 하는 일 자체 때문에 인간이 서로 다른 평가를 받게 되는 것은 성서의 가르침이 아니다. 인간의 불평등과 노동에 대한 천시는 오히려 하느님을 모르거나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인간의 행동이다. 이는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려 든다거나 부당하게 자기 이득을 취하려는 욕심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33) 재화나 권력을 독점하고 이웃 위에 군림하려는 죄상이 인간 소외와 노동의 소외를 가져왔다.

아이바흐(J.Eigach)는 고대 희랍이나 라틴 문헌을 인용하며 이 불평등과 노동에 대한 잘못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고대 철학에서는 노동과 휴식(여가)을 사회 계급상의 대치 관계로 표현했다. 육체적 노동에 대한 호메루스(Homerus)나 헤시오두스(Hesiodus) 등의 견해를 플라톤 (Platon)도 가지고 있었으며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에 이르러서는 육체적 노동은 곧 노예의 일로 간주하게 되었다. 수공예자들(?????)도 온전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다. 노예는 결국 물건 취급을 받았다. 육체적 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은 정치에 참여할 수 없으며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그런 사람들은 덕을 닦을 수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노동과 여가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이해되었다. 여가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아니라 손수 해야 할 일에서 해방된 여유이고 철학과 정치를 목표로 하는 것으로서 노동과는 전혀 구별되는 것이었다. 일하는 대신 여가를 갖는 것은 하나의 이상이다. 현대에 이르기까지 두뇌(頭腦)노동과 근로노동을 원천적으로 구분하여 사회기능적 인간 집단으로 구별하는 유래는 이미 여기서 연유된다 하겠다."34) 이러한 사상은 우리 나라의 근세사회 안에서도 큰 차이가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이러한 사회구조와 가치평가에 대하여 근면과 노동을 권고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으며 수도승들이 "기도하며 일하라"고 하여 실제로 육제적 노동을 열심히 간 것은 그 리스도 교회의 문화적 기여라고 아니할 수 없다.35) 비록 노예해방이나 사회 개혁을 정치적으로 외치지 않았지만 인간 해방을 위한 근본적 사상을 바꾸어 온 것이다.36)

라) 노동은 인격적 행위이므로 인간의 삶의 영역 전체와 관련되고 각자의 소명적 의미를 지닌다.

"인간의 생활은 매일 노동으로 이루어지며, 노동에서 인간은 독특한 존엄성을 얻는다.37) 하느님을 닮은 인간이 자기 본연의 임무인 노동을 함으로써 인간은 노동을 통해 총체적이며 가장 인간다운 사명을 다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인이라면 노동과 예배를 별개의 것으로 완전히 분리하지 않고 예배의 다른 한 양식임을 인식하며 노동의 신성함을 인정 한다.38) 주일에 노동을 못하게 한 교회법의 이유는 노동의 가치와 세속성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당시 외교 문화권에서 노예들에게 노동이 강요되 었으므로 노예들을 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일의 예배와 쉼의 온전을 주는 의미도 있었던 것이다.39) 그러므로 교부들은 주일에 한가로움이나 여흥보다는 노동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까지 하였다.40)

"노동은 자가 노동이든지 고용된 노동이든지 직접 인격에서 나오는 것이며 인격은 자연물(自然物)에 자기 모습을 새기며 자연물에 자기 뜻을 굴복시킨다."41)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노동에 임하면서 자기에게 맡겨진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사명을 다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성실하고 경건하게 이행한다. 왜냐하면 자신은 바로 그 활동을 통하여 하느님을 찬미하 고 구체적 자기 실존을 향유하기 때문이다.42)

마) 노동이 인격적 행위이며 소명의 수행이므로 인간은 노동의 결실이나 노동의 대가에 대한 기본적 권리를 갖는다. 노동이 인간 삶의 표현이며 자기 소명의 이행이므로 노동의 권리와 의무는 동시에 나타난다. 그리고 노동을 원활하고 유효하게 이행하기 위한 조건도 요구하거나 갖출 권리와 의무가 있으며 이를 위한 기본적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43) 쾌적한 노동조건이라든지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수는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정당한 수준이여야 한다.44) 일한 몫과 대가에 대한 권리를 성서는 "곡실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신명 25,4)는 격언적 명령이나 일꾼이 자기 몫을 받을 정당한 권리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45)

인간의 범죄는 창조질서를 거역한 것으로 노동의 질서도 파괴하였다. 오늘에도 이는 마찬가지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노동의 자격과 권위를 주셨다. 46) 그리고 인간의 한계성과 삶의 길도 미리 알려주셨다.47) 그런데 인간은 하느님께 신뢰하지 않고 배반하였다. 그 결과는 곧 하느님께로부터의 자기 소외이며48) 인간으로부터 노동의 소외이다.49) 노동에서 오는 노고는 하느님의 벌이라고 말하기보다 인간이 하느님을 배신한 결과이며, 창조질서에서의 노동의 의미보다 인간이 범죄하여 창조주 하느님을 배반하고 등진 결과로서의 인간 노동은 고통과 재앙과 실패와 연관을 갖게 되었다."땅 또한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 들에서 나는 곡식을 먹어야 할 터인데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리라"(창세 3,17-18)라는 선언이나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오늘날까지 다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하느님의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날과 우리 몸이 해방될 날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로마 8,22-23)50) 하는 말은 현실의 노동조건은 인간이 범죄한 후의 파괴되고 헝클어진 질서 안에서 이루어짐을 암시한다. 현실의 노동은 원만하고 조화있는 상태가 아니다. 그 때문에 노동은 구원의 질서로의 전환과 변화가 요청된다. 이를 긍정하고 새 질서를 추구할 때 노동에 대한 바른 이해는 가능하다. 이 사실은 인류 문화의 발전이나 기계문명의 혜택에 결부돼 있는 자연 약탈과 파괴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인간의 도구 사용이나 기계문명은 노동에서 오는 많은 노고를 인간들에게 감소시켜 주었고 상상할 수 없는 위대한 업적을 쌓아 올렸으나 반대로 그의 역기능으로서의 자연 파괴와 오염과 공해들은 인간의 생명과 발전자체를 위협하고 있음을 본다. 그리하여 인간의 노력이 축복이 되기 위하여 노동 윤리의 준수와 함께 창조주의 뜻으로의 회귀, 곧 본래의 인간성을 회복하는 인간화의 길이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다. 창조로 주어진 인간의 존엄성이 회복되어 평등과 자유가 실현된다면 노동의 품위와 존엄성은 자연히 인정될 것이다.

Ⅱ. 노동윤리

노동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이해는 그리스도교적 노동 윤리의 기초와 원리가 된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그리스도교적 노동은 창조질서의 측면과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인간과 자연, 노동의 소외로 구원이 필요한 구세사적 측면이 있다. 전자는 인간의 실존과 노동하는 인간의 측면에서의 좁은 의미의 노동 윤리가 되고, 후자는 그리스도인의 노동 윤리로 구원론적 의미를 강조하는 영성적 측면이 된다. 교회사적으로 볼 때 인간의 노동은 영성적 측면의 일방적 강조가 있었다고 생각되기에 본고에서는 노동 윤리를 좁은 의미에서의 노동 윤리와 노동의 영성으로 나누어 다루어 보고자 한다.

이는 20세기 후반의 일부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이 속화의 원리를 주장하는 의미가 아니라 윤리신학과 영성신학적 관점에서의 구별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하다.

1. 노동 윤리

그리스도교적 노동 윤리를 논함에 있어 노동의 주체인 인간과 인간의 활동인 노동에 임하는 기본 자세와 지향 그리고 현실적 노동 상황의 제 문제를 구분하여 고찰할 수 있다.

가) 노동의 주체인 인간

세상 만물은 인간을 중심으로 하고 인간이 정점으로 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주장만이 아니고 인류의 공통된 의식이다.51) 현실적으로 인간에게 비애와 한계성이 뚜렷이 드러나고 있지만 인간은 하느님을 닮은 존재로 태어났으며 하느님의 위임을 받아 세상을 다스리고 이용하며 보존할 특권을 지녔고 양도할 수 없는 존엄성을 지닌 존재이 다. 52) 인간의 노동 윤리는 그 주체인 인간의 품위와 속성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여야 한다. 노동의 신성성은 결국 인간의 존엄성에서 연유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인권선언53)에서 열거하고 있듯 인간 각자의 자유와 평등에서 보호되고 유지되는 것이다. 인간은 지식이나 능력이나 사회적 지위나 물질적 재화의 축적 등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가치는 무엇을 가졌느냐에 있지 않고 어떤 인간이냐에 있으므로"54) 인간 각자는 긍지를 가져야 하며 서로 존경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노동의 윤리는 결국 인간의 모든 노력을 인간화에 집중시키는 데 있다. 또 그런 노력만이 가치있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과 위대함은 구체적이며 현세적 실존에서 세계성과 사회성을 통하여 드러나야 한다. 인간의 연대성과 사회성은 신체적 구성 요소에서 만이 아니고 그의 출생과 성장과 성숙의 과정에 있어 철저하게 물질적 조건을 필요로 하고 있으며 그 조건에 따라 존속한다.55) 여기에서 자연 환경과 생태학적 조건의 중요성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는 자기 자신의 성숙 과정에 있어 주위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으며 또 자신도 이웃에게 영향을 줄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 존재의 바탕에서부터 의존(依存)적이며 위존(僞存)적이다.56) 이는 인간의 생활과 성장 과정에서 잘 드러난다. 부모가 자녀들을 위하여 생활하는 것이나 인간 사회에서 존경받는 사람들은 이웃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고 활동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도 볼 수 있다.57)

노동의 주체인 인간은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피조물이다. 창조주의 위임을 받아 하느님을 닮은 존재로서 감사와 찬미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하는 존재이다. 이웃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같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늘 평등과 자유와 사랑으로 유대해야 한다. 자연에 대하여는 창조주의 위임권을 행사하는 존재로 하느님 뜻에 순응하며 지배하고 가꾸며 활용하게 된다. 그의 모든 활동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하며 바로 그 안에서 자신의 자율과 능력과 품위도 드러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에 초대받은 존재이며, 상속자로서 주님이 오시어 완성하시는 그날까지 인내와 성실로 생활해 나아가야 사명을 자각하는 것이 중요하다.58)

나) 노동하는 인간

인간의 활동 대상인 노동은 실제로 자연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므로 노동의 대상이 되는 자연에 대한 바른 인식이 전제된다. 그리스도교의 창조신앙은 자연을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자기가 지키고 활용할 대상으로 여긴다. 그리하여 자연을 지키며 활용하는 인간은 자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정신과 지식을 갖추지 않으면 안된다.

첫째, 자연에 대하여 주인으로서 주권을 행사한다. 자연을 개발하고 활용하여 가꾸어 나아감으로 자기의 성장과 성숙에 활용한다. 자연을 활용하고 가꾸는 데 있어서 인간은 자기 임의대로가 아니고 자연이 지니고 있는 질서와 특성을 알아내고 그 속에 잠재해 있는 힘과 보화를 발굴해야 하고 이용한다. 자연과학의 발달과 문화의 발달은 자연의 혜택이 얼마나 큰 것이지 알게 되었고, 인간의 한계성에 도전하며 기계문명을 이록했다.

이로써 풍요와 부를 축적하고 능력의 큰 증대를 이루었다. 그러나 인간이 주인으로 남아 있지 않는 한 인간은 기계의 노예가 되며 오히려 자율성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이는 산업 혁명과 기계화 문화가 현실을 위협하고 있는데서 더 잘 느끼게 되었다. 자연에 대한 주권 행사는 지혜와 절제가 요청된다. 이 균형을 잃을 때 인간이 개발한 능력만큼 비례되는 불행과 예속도 따라올 것이다.59)

둘째, 인간은 노동으로 재화를 획득하고 미래를 설계하며 생활의 안정

을 도모하게 된다.60) 노동의 목적에 대한 전통적 이해에 가장 먼저 오는 이것들은 인간에게 희망과 기쁨을 준다. 노동의 결실을 차지하는 것은 자연이 인간에게 준 기본 권리이며 생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할 뿐 아니라

자유로이 미래를 계획할 수 있는 기반으로 인간다운 삶의 설계를 가능케 한다. 그러므로 생산 수단의 발다로 말미암은 재화의 풍요로움은 축복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연 자원은 한계가 있는 것으로 인간이 가꾸지 않고 소비만 한다면 자원의 고갈과 함께 인류의 미래를 위협할 것이다. 인간의 지나친 욕망과 낭비는 인류의 축복보다는 위협이 되고 있다. 자연을 가꾸지 않고 취득만 하려 한다면 그는 착취가 될 것이며 자연에 대한 폭력이 될 것이다.61)

셋째, 인간은 노동으로 자신만이 아니라 이웃에게 봉사한다. 가족의 활동이나 사회적 직업 활동은 노동하는 사람 자신만이 아니고 인간의 사회성에 근거하여 이웃에게 도움을 주고 봉사를 하는 행위이다. 공동선을 추구하는 사명으로서는 인간은 자신만이 아니고 자기가 도움을 주어야 할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이다. 재화의 획득은 남을 도울 수 있는 능력의 축적이고 사회 발전의 기틀이 되는것이다.62)

넷째, 인간의 노동이 모두 유익하고 건설적인 것은 아니다. 인간의 범죄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배척하는 것이며 같은 맥락에서 이웃과 협력하지 않거나 자연 질서에 역행하는 행위들이다. 이러한 노동은 본 의미를 상실할 뿐 아니라 인간 자신에게 피해를 주게 된다. 그러므로 노동은 일반적이고 원리면에서만 구별되는 것이 아니고 윤리적 의미와 함께 원리의 적용 문제까지 논의해야 노동 윤리의 실제적 측면이 나타날 것이다.

다) 노동의 원리와 실천

노동의 주인인 인간이 노동으로 얻게 될 결과를 위하여만 투입되고 이용된다면 가치의 전도이며 주객을 도치시키는 것이다. 광고가 사람을 사로잡아 소비와 낭비를 조장하듯 노동의 주체인 인간의 인격이 상실되어 상품화되고 생산 능력으로만 평가된다면 인간은 생산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것은 자유 자본주의나 공산주의적 집산주의(集散主義) 체제에서 드러나고 있는 반인간적 죄악이다. 비록 노동의 목적을 생계 유지와 인간 발전을 위한 재화의 획득과 이웃을 위한 봉사와 자기 수양의 길이라고 볼 때 그 기초와 목표는 항상 인간화되어야 한다. 인간의 존엄성이 고취되고 인간과 사회가 발전하는 방향으로의 노력이 아니면 하느님을 닮은 인간으로서의 노동이 아니고 하느님을 등지고 자기 중심적으로 착각에 의한 "자율"을 추구하는 인간의 범죄 행위가 될 것이다. 성서가 인간의 활동과 노력을 인간의 일과 하느님의 일로 구분하는 것도 이 때문 이다.63)

첫째, 인간은 자신의 품위와 능력에 대한 자긍심을 가져야 한다. 이는 양도할 수 없는 인간의 기본권에 바탕을 두고 있다.

둘째, 인간은 모든 활동은 자신과 이웃의 성장과 발전의 관점에서 이행되어야 한다. 이와 같이 자기의 개인 욕망과 이기심이 절제되고 극복될때 죄로 말미암아 파괴되고 혼란에 빠진 인간은 노동은 구제될 수 있다.

왜냐하면 죄의 구조는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데 자리잡고 있기 때문램다.64)

셋째, 인간은 자기의 처지와 능력대로 노동의 의무와 권리를 가지고 있으므로 이 기본적 사명을 다해야 한다. 이로써 타인에 의하여 "무용한 인간" "게으른 인간"이란 평가도 받지 않을 것이다. 또한 봉사적 자세와 활동으로 인간 공동체를 키워 나가고 공존의 보람을 느끼게 된다.65)

넷째, 인간의 자유와 평등이 노동현장에서 보증되기 위하여 개인과 사회가 공동으로 협력해야 한다. 개인은 자신의 소질과 능력을 개발하고 사회는 균등한 기회를 제공하고 개인의 재질을 발굴하는 데 노력해야 한다.

이때에 직업적 노동 활동이 소명으로 자각되며 인간 각자의 보람도 얻게 된다. 기계 문명의 발전과 자동화, 첨단 기술 등은 심각한 실업 문제도 야기시키고 새로운 직업 훈련을 강요하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는 정부와 기업이 공동 노력해야 인간의 품위와 우위성이 보존될 것이다.

다섯째,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기계 문명은 인간에게 긍지를 심어 주고 한계성에서 해방시켜 주지만 균형있는 발전과 인간적 유대 관계가 고려 되어야 변화의 충격을 극복할 수 있다. 예컨데 생산 기기의 자동화가 인간의 기계화나66) 실업자를 양산하는 67) 사회 구조를 낳게 한다면 건전한 발전의 종합적 계획에 역행하는 것이다. 인간은 항상 속도와 변화와 기계화에 대하여 주인으로 남아 있어야 균형과 질서를 잃지 않는 발전을 기대 할 수 있다.

여섯째, 노동은 인간의 활동이므로 노동하는 인간은 인간다운 노동의 환경을 가질 권리가 있으며 노동의 자유로운 선택과 정의로운 보수를 받을 권리를 갖는다. 그러나 보수 문제는 복합적 경제 문제를 내포하기 때문에 소위 노동계약 조건에서만 볼 것이 아니고 정책적이며 사회복지적 측면에서 함께 생각할 문제이다. 노동을 단순한 취업(job)으로만 볼 것이 아니고 인간적 활동의 차원에서 직업과 소명의 일(Work)로 보아 친교와 연대성 안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아울러 인간이 노동에 사로잡혀(work- holic) 자유와 품위를 상실하지 않기 위하여 정당한 휴식과 휴가, 마음의 여유를 간직하도록 노동자 스스로 노력해야 하며 사회적이고 정치적 뒷받침을 해야 한다.68)

2. 노동의 영성(69)

계시 진리를 실제 생활에 적용하여 새로운 삶을 형성하는 것이 영성이다. 노동의 영성도 성서 안에 계시된 진리를 노동의 현장에서 수용하여 실천하는 것이다. 노동이 창조된 인간에게 부과된 사명이라면 노동을 통해서만 그 영성도 드러난다. 하느님을 닮은 인간이 하느님의 위임을 받아 일하는 것이라면 반드시 그의 노동에서도 하느님의 모습이 드러나야 할 것이고 위임하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목표가 참 하느님의 계획으로 이루어졌음을 알고 믿으며70) 그분은 모든 인간에게 '길이고 진리이며 생명임"(요한 14,6)을 고백한다. 인간의 노동도 그리스도 안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바른 실천의 길을 배우고 완성에 도달하게 된다.71) 이때에 살아 있는 인간은 진정 하느님의 영광일 것이다.72)

가) 인간의 노동을 창조질서에 대한 신앙으로 승화시킨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위하여 세상을 창조하시고 축복해 주셨다. 비록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본래의 질서와 행복은 잃었어도 피조물로서의 질서와 의미가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니다. 그뿐 아니라 인간은 이 세상의 삶을 통해서 구원되도록 불리운 존재다. 인간은 누구나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겸손하고 성실하게 받은 임무를 다해야 한다. 이리하여 창조주의 일에 동참하게 된다. 기계 문명이 사람들에게 큰 혜택을 준 것도 사실 이지만 인간이 늘 기계의 주인으로 남아 있지 못하면 자신의 존엄성을 상실하게 된다.

나) 노동은 인간의 범죄로 본래의 의미와 질서를 많이 상실하였다

현실적으로 인간의 노동은 땀과 피곤과 좌절을 안겨 주는 경우가 허다 하며 파괴와 죽음을 가져오는 죄스런 행동도 많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현실 속에서도 새로운 질서와 의미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 이 곧 구원의 차원이다. '죄 외에는 모든 점에 있어 우리와 같은 처지에 계셨으며"(히브 2,10;4,15-5,10)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운 차원이 열린 것이다. 누구나 예수의 이 구원의 길에 동참함으로 인간 노동의 새 의미와 새로운 차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2고린 4,1-18;6,2-10).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이 진리를 받아들이며 노동에서 오는 고통과 실패, 좌절과 근심 속에서도 자기의 삶과 이웃에 대한 봉사의 길을 깨닫고 받아들이게 된다.

다) 그리스도인은 노동과 함께 쉼의 의미를 알고 받아들이다.

창조의 신앙과 구원의 의미를 노동 안에서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은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이 노동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여긴다. 그리고 현세나 노동이 인생의 목적이 아님을 안다. 이 세상에서 노동하는 것이 대단히 소중한 것인지를 알지만 그에 사로잡히지는 않는다. 이는 마치 농부가 씨앗을 소중히 여기는 데 비유할 수 있다. 소중한 씨앗을 뿌리고 가꾸어 새로운 결실을 얻기 위하여 희망 안에서 인내롭게 노력하며 새 결실을 기다릴 줄 안다.73)

맺는 말

인간으로 태어난 존재가 인간답게 살아가는 길이 인간 윤리라면 일할 소명을 타고 난 인간이 소명을 주신 분의 뜻을 따라 일하는 것이 노동 윤리다. 노동의 가치와 품위는 인간의 가치와 품위에서 나오는 것이다. 창조주를 닮은 인간이(창세 1,26-28) 그의 위임을 받아 하는 노동은 창조주의 일에 동참하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으로 행동한다면 그는 하느님을 거역하는 것이고 자기 자신을 해치는 것이 된다.

이는 자기 존재의 질서와 의미를 파괴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창세기의 기록은 바로 이 진리를 설화적으로 가르치는 것이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인 하느님을 배반하고 자기 욕망에 따라 행동할 때 인류 공존의 질서는 사라지고 질투와 시기, 살인과 혼란만이 찾아온다.74) 그리하여 하느님을 거역하고 자신을 추구하는 인간은 이중의 죄를 짓는 것이다; "나의 백성은 두 가지 잘못을 저질렀다. 생수가 솟는 샘인 나를 버리고 갈라져 새기만 하여 물이 괴지 않는 웅덩이를 팠다."75) 인간의 소외가 곧 노동의 소외를 불러들였고 노동의 소외는 인간의 비참을 가져왔다.76) 그러므로 이 이중의 소외를 극복하는 길은 노동을 인간화하는 것이다. 이 극복의 길, 인간화의 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류의 역사 안에 나타난 것이다. 그를 통해 인간은 하느님과 화해됐으며 만물은 잃은 질서를 회복하게 되었다.77)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 인간을 받아 주셨듯이 인간도 서로 받아들여야 하며 이렇게 인간이 화해하면 만물도 잃은 질서를 되찾게 된다.78) 이러한 노력을 하는 것은 바로 인간화에 동참하는 것이며 "마침내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 있어서 하나가 되어 성숙한 인간으로서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79) 이렇게 성화(聖火)될 때 "현세 사회에 있어서도 보다 인간다운 생활 양식의 촉진제가 되는 것이다.80)

-[(신학과 사상) 제4호(1990/12)]

-----注---------------------------------------

1)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사목교서, <사회의 인간화를 위하여>(1985),3.

2) 요한 바오로 2세,<노동하는 인간>(1981),7:산업화 사회 이후에 더 확대된 노동의 상품화와 생산성의 도구화는 심각한 인간의 소외와 노동의 소외를 가져왔다.

3) 봉건사회나 계급사회에서는 흔히 직종과 인간의 품위가 연관되어 있었다. 소위 Opus servile (노예의 일거리)라는 용어가 있는가 하면 우리 사회에서도 농상공(農商工) 등으로 사람이 품위와 등급이 결정되어 있었다.

4) 실업자의 휴식이나 쉴 줄 모르고 일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여가는 의미없는 것이 되고 집단주의적 공산정권 하에서 개인의 노력이나 자유 자본주의 하에서 임금이 인권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5) 그리스도교가 세상을 이원적(二元的)으로 생각하는 희랍철학의 영향을 받아 영육(靈肉)을 현세와 내세로 분리하는 경향이 많았으나, 이런 경향이 극복되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역할은 물론이고 메츠(J.B.Metz)의 "정치신학"은 큰 역할을 했고 중남미의 해방신학도 큰 기여를 했다. 프로테스탄트에서도 고가르텐(F.Gogarten), 본회퍼(D.Bonhoeffer) 등의 창조질서와 현실 참여에 대한 기여와 영미 계통에서의 로빈슨(J.A.T.Robinson), 콕스(H.Cox) 등의 속화신학(俗化神學)도 그리스도교 내의 사상 전환에 큰 역활을 했다.

6)일반적 단어로는 "하다""만들다"의 뜻이 있는 ( )와 ( ) 등이 있고 "봉사한다"는 의미도 내포하는 ( )이 있다. 일반적 노동을 의미하는( ),( )등의 단어들이 있다.

7) 현재 인간의 노동 상황은 인간에게 주어진 본래의 상태가 아니라는 ) 성서신학 사전이나 기독교적 노동관에 대한 글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고 주장한다.

8) F.Hauck, "Arbeit", in: RAC(Reallexikon fur Antike und Christentum) I, p.597. 특히 자연을 지배하고 보호나는 임무를 다하지 못하고 잇다.

9) 자연의 약탈과 자원 고갈 및 생활 환경의 오염은 바로 노동의 무질서와 자연보호의 실종에서 나온 결과이다. 이는 하느님의 위임을 받은 인간이 하느님과 관련없이 자기 중심으로 노력한 모습이라 하겠고 이것은 곧 자기 자신과 자기 삶의 터전인 자연에 대한 범죄라 아니할 수 없다. 힘만의 논린는 폭력을 부르고 폭력은 질서를 파괴하여 자연을 무질서하게 만들고 받은 능력마저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10) 2) 창조질서 안에서 볼 때 하느님이 이루신 일은 "보시니 참 좋았다"(창세 1,10.13.18.22.25). 이 좋은 일에 인간은 동참하는 것이고 하느님을 닮은 존재로서 하느님이 이루신 일을 받들고( ) 보존해야 했었다( ). 그러나 인간은 이 삶의 질서를 거역하여 스스로 고통과 죽음에 떨어졌음으로 본래의 창조실서는 인간 안에서 파괴되고 상실되고 있다. 이 결과로 현실적 인간 세상 안에서는 하느님의 일과 인간의 일이 구분되며 인간의 처지는 구원과 완성으로의 일과 반항과 자기 상시로 결정된다. 인간의 노력이나 능력과 그 결과가 인간의 판단에 달려있지 않고 현실 질서의 의미와 목적을 마련하신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다. 따라서 인간의 눈으로 보는 일의 성공과 실패는 상대화된다.

9)J.Eibach. "Zum Thema : Arbeit und Ruhe im AT", in: ZEE(Zeitschrift fur Evangelische Ethik) 24(1980/1),pp.11-14.

10) 박창환, <성서적 노동관>, <기독교 사상> 21(1977/11), 25-26쪽.

11)H.Rondet, "Arbeit", in: LThK(Lexikon fur Theologie und Kirche) I, pp.801-805; Idem, Die Theologie der Arbeit, Wurzburg, 1956; G.Bertram," ", in: ThWNT(Theologisches Worterbuch zum Neuen Testament) Ⅱ. pp.636-649.

12) 이사 41,4; 45,11; 43,1-4 등.

13) 요한 5,20.36; 7,3.21; 9,3.4; 10,25-38; 14,10-12; 15,24.

14) 마태 6,10; 26,42; 요한 4,34; 5,30; 6,38.

15) 마태 3,14-17; 16,22-23; 요한 19,30; 로마 12,2; 1데살 4,1; 12.

16) 창세 2,15; 4,20-22; 이사 28,23-29; 1데살 4,11; 2데살 3,10-12; 에페 4,28.

17) 이사 57,12-13; 58,1-5; 예레 2,13;28,2-17;() 등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18) 요한 3,19;7,7; 8,44; 1요한3,12; 2요한 11; 2디모 4,8등

19) G.Bertram, "?????", in: ThWNT Ⅱ, p.640

20) 박봉배, <勞動,職業,召命>, <기독교 사상> 21(1977/11),51쪽; 안명옥, <노동의 윤리 신학적 고찰>, <司牧> 53(1977/9), 23쪽

21) R.Henning, "'Tote' Arbeit gegen 'lebendige' Arbeit?, Notizen zu Stand-punkten der katholischen Soziallehre", in: DK(Diakonia) 15(1984/6), pp.381- 387.

22) 인류는 대부분 육체적 노동은 무식한 사람들이나 노예가 할 일이고 귀족이나 자유인은 정치와 한가로움을 취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F.Hauck, "Arbeit", in: RAC I, pp.585-590; J.Eibach, "Zum Thema: Arbeit und Ruhe im AT", in: ZEE 24(1980/1), p.7

23) W.Kramer, "Zur Diskussion um die Neubewertung der Arbeit",in: DK 15 (1984/6), pp.364-372.

24) 1데살 3,6-12.

25) P.Lippert, "Zum Sinn der menschlichen Arbeit", in:GuL(Geist und Leben) 46(1973/4), p.68: "Streng genommen gibt es ja 'die' Arbeit nicht. Es gibt be- sonders entfremdende Arbeiten, es gibt besonders ungerechte soziale Ver- haltnisse, die jede positive Erfahrung zu blockieren scheinen."

26) 1990년 3월 5-12일 서울에서 개최된 '정의,평화,창조질서 보존의 국제회의" 는 이에 대한 경각심을 더욱 불러일으켰다. JPIC에 대하여 참조: <기독교 사상> (1990/5), 144-155쪽.

27) A.Barucq, <勞動의 價値에 대한 코헬렐의 質問>, <신학전망> 17(1972/6), 85-88쪽; 시편 127,1-2.

28) A.Auer. <죄란 무엇인가?>, <司牧> 82(1982/7), 99-100쪽.

29)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일반적 직업 활동을 한 것으로 나타나며 하느님의 종인 판관들이나 이스라엘의 왕이나 예언자들도 평범한 일을 하던 자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판관 6; 1사무 9; 16,11-13; 1열왕 19,19-21; 아모 7,14-15; 집회 7,15-21; 38,1-15.24-34; 39,1-11).

30) 사도 18,3; 20,23; 1고린 9,15; 1디모 29; 2디모 3,8; 1고린 7,17-24.

31) 마르 6,3.

32) J.M.Lochmann,"Werk und Werkgerechtigkeit: Arbeit in christlicher und marxistischer Sicht", in: ZEE 22(1978/2), pp.105-117(<神學思想> 23(1978), 634-653쪽, 김균진역).

33) F.Steinmetzer, "Arbeitsruhe", in: RAC I, p.592.

34) J.Eibach, "Zum Thema: Arbeit und Ruhe im AT", in: ZEE 24(1980/1), p.7.

35) B.Stockle, "Die Arbeit der Monche. Gedanken zum Arbeitsethos der regu- la Benedicti", in: DK 15(1984/6), pp.373-380.

36) 필레몬서; 갈라 3,23-29; 2데살 3,6-12 등의 내용에서도 알 수 있다.

37) 요한 바오로 2세, <노동하는 인간> 1.

38)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헌장>34: "그들의 모든 일(...)가정 생활, 일상노동, 심신의 휴식 등을 성신안에서 행하며 더구나 생활의 번민을 인내로이 참아 받는다면(...)평신도들도 예배를 드리며 어디서나 거룩하게 삶으로써 이 세상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이다"; B.Stoeckle, op.cit., p.374.

39) 소위 주일에 금지된 노동이란 "Opus servile"(노예적 일)라고 명명되었으며, 파공의 기본 정신은 일을 못하게 아는 것이 아니고 주일의 의미와 예배에 방해 되는 인간 활동을 자제하는 데 있었다: F.Steinmetzer, "Arbeitsruh", in: RAC I, pp.592-593.

40) Cf.Augustinus, Enar. in Ps 32, 6: 91,2(PL36, 281;37,1172); Hieronymus, Prol. in Gal.(PL 26, 334).

41) 참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목헌장> 67; 요한바오로 2세,<노동하는 인간> 6.

42) A.Auer, Chirstsein im Beruf, Dusseldorf, 1966, pp.47-72; Idem,Welt- offener Christ, Dusseldorf, 1963, pp.30-48; 박봉배, <勞動,職業,召命>, <기독교 사상> 21(1977/11), 54-57쪽.

43) 노동의 세 가지 기본권인 단결권,교섭권, 단체행동권이 주어져야 한다. 참조: 요한 23세,<어머니와 교사> 22,143,148; 레오 13,<노동헌장> 70,71 등; 노동문제상담소 엮음.<노동관계 법령집>. 1989.

44) 이용훈, <가톨릭 교회의 노동관>, 수원가톨릭대한 <논문집> 2(1990), 82-91쪽.

45) 1고린 9,9-11; 1디모 5,18; 루가 10,7; 요한 바오로 2세, <노동하는 인간> 19; 마태 20,8-15; 창세 29,15-30 등,

46) 창세 1,28-30; 2,15-16.

47) 창세 2,17.

48) 창세 3,9-11: "야훼 하느님께서 아담을 부르셨다. "너 어디 있느냐?" 아담 이 대답하였다. '당신이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듣고 알몸을 드러내기가 두려워 숨었습니다.' '네가 알몸이라고 누라 일러주더냐? 내가 따먹지 말라고 일러둔 나무 열매를 네가 따먹었구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49) 창세 3,17-19: "아담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내의 말에 넘어가 따먹지 말라고 내가 일찍이 일러 둔 나무 열매를 따먹었으니, 땅 또한 너 때문 에 저주를 받으리라.너는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 살리라. 들에서 나는 곡식을 먹어야 할 터인데,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리라. 너는 흙에서 난 몸이니 흙으로 돌아가기까지 이마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얻어 먹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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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교회헌장> 4-5장; <사목헌장>; N.Greinacher, "Ist Arbeit fur den Menschen wesensnotwendig?", in: DK 15(1984/6), pp.361-363

51) <사목헌장> 12.

52) 유장선, <하느님 形相으로서의 인간의 尊嚴性>,<사목> 116(1988/3), 105-119쪽; 117(1988/5), 68-82쪽.

53) 인류의 역사 안에는 지역적으로 부분적 인간의 기본 권리와 품위가 인정되어 왔으나 1948년 12월10일 국제연합에서 공식으로 인간의 기본권을 선언한 것은 역사의 획기적 사실이 되었으며 그 내용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기본권이 천부적(天賦的)이며 양도할 수 없는것으로 천명하고 있다.

54) <사목헌장> 35; 바오로 6세, <담화문>, in: AAS 57(1965), p.232.

55) J.F.Malherbe, Pour une ethique de la medicine(Medizimische Ethik. Wurzburg, 1990, pp.23-70; A.Auer, Christsein im Beruf. pp.213-250).

56) J.Ratzinger, <그리스도 신앙 어제와 오늘>, 190-199쪽; F.Bockle, <기초윤리신학>,60-62쪽; J.F.Malherbe, op,cit.,pp.23-54.

57) 마더 데레사의 권위와 인기에서 쉽게 볼 수 있으며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희생된 전몰 장정들의 품위와 권위가 바로 그것이다.

58) <사목헌장> 39.

59) J.M.Lochmann, Werk und Werkgerechtigkeit,in: ZEE 22(1978), pp.106- 113.

60) 인간 노도의 가장 원초적인 목적이 재화의 획득과 생계 유지를 위한 것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61) A.Auer, Umweltethik Theologischer Beitrag zur Okologischen Diskussion, Dusseldorf ,1984; C.Merchant, The Death of Nature. Women, Ecology and the scientific Revolution Cap.2; H.Rug, "Zur Frage nach der Begrundung der Naturschutzes", in: ZEE 31(1987/2), pp.125-133; Lochmann, op.cit.,pp.110-113.

62) <사목헌장> 67: < 노동하는 인간> 19.

63) G.Bertram, in: ThWNT Ⅱ, pp.636-642.

64) 요한 바오로 2세, <사회적 관심>(1987),36: "상호 의존과 연대의식 대신에 갖가지 제국주의가 휩쓰는 세계는 죄의 구조에 종속된 세계가 될 수밖에[...] 부정적인 인자들을 모두 합치면 [...] 죄의 구조(Structures of Sin)라는 이야기 를 할 수 있겠다."

65) 1데살 4,11-12; 2데살 3,6-12.

66) 산업화 과정에서 생산성의 향상을 위한 기계화는 기계 앞에 서 있는 개별 노동자들을 기계에 예속시켰고 부품 생산에 기계적 참여를 강요하여 노동과 결실의 성취감을 소외시켰다.

67) 이미 많은 사람이 우려했듯이 노동자들이 노고에서 해방을 지향하던 기계는 노동자들에게서 노동의 기회를 앗아갔다. 소위 생산 기기의 자동화는 많은 실업자를 낳아 새로운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W.Kramer, "Zur Diskussion um die Neubewertung der Arbeit", in: DK 15(1984/6), pp.366-369.

68) P.Lippert, "Zum Sinn der menschlichen Arbeit", in: GuL 46(1973/4), pp.268-269; B.Stockle, "Die Arbeit der Monche", in: DK15(1984/6), pp.374-380.

69) 이용훈, <가톨릭 교회의 노동관>, 수원가톨릭대학 <논문집> 2(1990), 177-122쪽.

70) 에페 1,3-14; 골로 1,25-28.

71) A.Auer, Weltoffener Christ, Dusseldorf, 1963; Idem, Christsein im Beruf. Grundsatzliches und Geschichtliches zum christlichen Berufsethos, Dusseldorf, 1966.

72) W.Kasper. <일치의 성사인 성체성사>, <신학과 사상> 2(1989/12), 16-18쪽; 유장선, <하느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의 존엄성>, <司牧> 116 (1988/3), 111-117쪽.

73) 마르 4,26-29; 야고 5,7.

74) 창세 3-11장.

75) 예레 2,13.

76) G.Bertram. in ThWNTⅡ, pp.640-642.

77) 2고린 2,5-21; 에페 2,11-22.

78) 참조: 지혜 11,21-12,2; 로마 5,6-11; 요한 3,16-17 등 및 로마 8,18-30.

79) 에페 4,13.

80) <교회헌장> 40.

노동윤리 -성서적이해   -[(신학과 사상) 제4호(199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