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이사네 이관희 수필모음-


有勞必賃


임금을 받기 위하여 일 하는 것과 임금을 받지 않고 일만 해주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 임금을 받고 일해 주는 관계는 산업사회의 기본이 되는 것으로 이러한 동기로 인해 사회가 활성화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반면 임금을 받지 않고 일해주는 사회는 가족관계가 아니면 곧 노예사회이다. 최근까지 이 말을 망설여 왔지만 이념의 벽이 무너진 지금에 와서는 긴 설명이 필요없게 됐다.

무노무임(無勞無賃)에 대하여는 노사간 흥정의 대상으로 삼고 심지어 문란의 빌미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금 일해주고도 노임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 눈앞에 전개되고 있건만 노동자를 대표한다는 노조조차 문제의 핵심을 논한바 없고, 기업주는 가능하면 은폐하여 법망을 교묘히 회피하려 하다보니 막상 유노유임(有勞有賃)에 대한 말은 듣기조차 생소해서 차마 여기에 제목으로 걸기에도 생소할 정도이다. 노사간 흥정의 대상이 되어본 일도 없다. 다만 해가 바뀔때나 추석이 임박하면 신문 귀통이에 조금씩 비춰지는 정도에 불과하다.

그때마다 천여억원의 임금체불이 발생하니 정부차원에서 노력이 필요하다는 정도로 그친다. 어림잡아 1인당 백만원상당의 체불이라 하더라고 10만명의 노동자가 가정을 이끌어갈 능력을 상실하고 그의 가족들이 거리를 방황하는 사태가 발생하게 되는데 이러한 실상이 단순히 일과성 대책으로 해결할 문제로 덮어버리기에는 심각한 고질적 병폐로 남아 많은 아픔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아픔은 정상적인 사회발전경로를 거쳤다면 이미 해결되었을 것이지만 아직 문제거리로도 떠올리지 못하는 정도라면 이 방면의 지식층에 있다면서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인한 인생의 파탄을 다소라도 막아 주기 위하여 산재보상제도가 있다. 이는 신체적 고통을 다소나마 덮어주기 위한 방편이며 장차 정신적인 위로부분에 대해 가끔 논의를 하는 형편이어서 그 가능성을 엿보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노임을 체불 당하여도 이에 대한 대책은 없다.

한낱 임금우선변제법규를 따지는 정도에 그치고 이를 뒷받침할 만한 방법이 없이 답답한 사람이 샘을 파게 만드는 정도에 머물고 있다.

회사가 부도를 당했다고 해서 소속 노동자에게 책임을 밀어 붙이거나 하는 것처럼 무심히 넘어선 추석과 섣달 그믐날, 사회의 모든 부조리와 병폐가 지세웠지만 아직도 임금체불 대책은 마련되지 않고 있는 실정에 있다.

기업의 존망은 자본주의사회에서 경제정의로 분류될지 몰라도 그 후유증으로 인한 노동자의 정신적 방황은 오히려 살아남은 다른 기업에게까지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다른 기업에서 종사하는 모든 노종자의 눈앞에 미래로 떠올라질 것이며, 상처입은 노동자를 수용한 다른 기업에게까지 상당기간 진통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후유증을 미리 예방하기 위한 기업과 정부의 따뜻한 보살핌이 필요하다.

有勞必賃!
이는 모든 정의에 앞선 정의로서 대접받아야 마땅하다. 거듭 말하거니와 임금우선변제제도가 있는 한 임금채권보장제도나 기금이 경제정의실현을 위해 이미 마련되어졌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