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니없는 황소        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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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를 삽시다



  우리와 일본은 숙명적으로 만난 이웃이자 때로는 원수이기도 하다. 비록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오고간 역사가 수 천년에 이르고 형제 나라처럼 오순도순 살아오던 세월이 많았지만 400년전부터는 원수지간이나 다름없는 관계로 변했다. 지금도 우리는 그들로 인하여 입은 피해가 엄청나건만 살을 깎고 뼈를 저리는 아픔도 이웃이란 인연 때문에 꾹꾹 눌러 참으며 살고 있다.

                                        -「왜적의 침략비책」중에서





민족주를 삽시다




  그대는 앞으로 얼마나 더 이 세상에 살아 있을 수 있다고 보시오? 기껏 몇 십년이겠지요?

  그러나 자기만은 몇 백 몇 천년을 살 것처럼 거들먹거리는 이도 있소. 차마 할 말은 아니지만 내일 당장 죽게 될 인생일수록 더 기고만장합니다.

  자신이 먹여 살리고 있는 자신의 몸뚱이를 어루만져 보오. 주름이 더덕더덕 붙거나 피둥피둥 살찐 몸을 거울에 비춰보오. 보드랍던 옛 얼굴이 겹쳐 보일 것이오. 애지중지 먹여 살리고 호강시켜 주고 싶은 처자와 자손들, 그들 역시 앞으로 얼마를 더 살 수 있을 것이며 설사 그들이 백년을 더 산다 해도 그대의 이름조차 기억해주는 자손은 없을 것이오. 한해 한 번 있는 제삿날을 귀찮게 여기지 않는 것만으로 만족하시오.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 살고 있는 생물체의 이름을 아시오? 바로 그대가 속한 한민족이외다.

  예로부터 오래 사는 생물 열 가지 중에 목이 긴 학두루미와 목이 없는 거북이가 천년을 산다 하지만 이보다 더 오래 사는 것이 현재도 함께 하고 있는 줄 아는 그대가 처음이 되오.

  한민족은 엄연히 반만년 동안을 살아 숨쉬는 생체로서 이보다 더 오래 사는 것이 어디 또 있소? 현재까지 그 끈질긴 목숨은 무려 5천년이 되었소. 하나의 민족으로 5천년 이상의 역사를 누리고 있는 민족은 없소이다. 한 민족이 꾸준히 살아 남아 전통과 문화를 연연히 이어가는 이렇게 길고 끈질기게 살아남을 수 있는 기록은 유지하기 쉽지 않다오.

  현재 가장 수익을 많이 그리고 오래도록 올릴 수 있는 안전한 주식은 어느 것이라 여기오?

  모 재벌의 우량주식이오? 하지만 개방화 국제화 시대를 맞이하여 서서히 힘차게 밀려드는 다국적 기업들의 폭발적으로 올라가는 그런 주식이 안전하다 믿을 수 있겠소? 그러나 어느 것이라도 눈 하나 잠깐 돌리는 순간 상황은 급전직하 변하는데 그래도 그대는 눈알을 붉히며 죽음 직전까지 그 짓을 반복하겠소?

  민족주(民族株)를 많이 사둘 의향은 없으시오? 예를 들면 민족의 생활터전인 국토보전, 환경보호 또는 우리 한민족의 발전을 위하여 투자할 생각을 해보면 어떻겠소? 민족의 문화발전을 위해, 민족정기를 떨치게 하기 위해, 그 동안 상처 입은 민족정서를 어루만져 주기 위해 도서관 하나 더 지을 생각을 해보오.

  이국만리 떨어져 설움 받고 사는 재외교포 자녀들을 위해 한글로 된 책 한두 권이라도 전해주는 등 민족을 위한 모든 일에 자신을 바친다면 그것이 곧 투자라 할 것이오.

  이 밝고 탄탄하고 믿음직한 우리 한민족에게 투자한 경우에는 위험부담이 전혀 있을 수 없어 마치 주식보험에 가입한 것처럼 안전한 투자라 할 수 있을 것이오. 그러나 그대를 비롯해서 우리 민족 모두가 투자할 곳에 투자하질 않고 오로지 이기주의에 탐닉한다면 그대는 물론이고 그대 자손, 형제, 후손들은 이 땅, 이 지구 어느 구석에서도 온전하게 살아 숨쉬고 살 수 없을 것이외다. 이는 물론 그대의 무관심으로 빚은 결과로 모든 것을 잃은 탓이 아니겠소?


최근 일본의 사회복지 동향



  현대사회는 복지국가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진 산업국가들은 물론 개발도상국조차 국가개발의 최종목표를 복지사회의 실현에 두고 있을 정도로 사회복지는 현대사회의 특징이다.

  우리나라에 있어서도 최근에 와서 복지사회 건설이라는 구호가 부상되어 이젠 귀에 익게 되었다.

  현대 지역주민의 생활과 복지의 상태는 복지국가가 계획 실시하고 있으며 풍요로운 사회적 정책 안에서 지켜지는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고 믿게끔 정치적으로 지향되고 교육적으로 길들여져 오고 있으며, 법률의 조문은 형식을 갖추고 매스컴을 통해 정보가 흐르고 있다.

  이렇게 하여 그와 같은 것들이 사회복지 또는 국가복지의 전부인 듯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바라볼 때 노동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일들과 사회 전반의 모순들을 생각해 볼 때 그야말로 복지라는 개념을 재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일본에서는 인구의 고령화 현상을 포함하여 모든 사회사상 흐름이 사회복지라는 측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일본은 전후 고도의 경제 성장과 더불어 사회복지에 대한 관심이 크게 일어났으며 지금도 계속 진행되고 있다. 그러면 세계의 선진국에 속하는 일본의 사회복지 동향의 경향을 짚어 보고 그 속에서 문제점,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 그리고 나름대로의 주장을 기술해 보고자 한다.

  먼저 일본의 사회복지시설의 정비 상황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한다.

  지역복지활동의 목표를 지역 주민의 생활권 보장을 위한 조건의 정비, 창출이라고 한다면 지역사회에 있어서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는 기관과 조직의 범위는 대단히 광범해질 것이다. 단순히 사회복지 관계 뿐만이 아니고 교육기관, 사회교육, 의료, 위생, 레크레이션 등에 관계되는 모든 공사(公私)기관, 조직체의 활동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사회복지 영역에서만 한정하여 최근 일본의 지역적인 복지시설의 정비 상황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사회복지시설의 일반에 있어서 그 종류의 다양화 경향이 현저하다는 것이다. 그 중에 특히 증가율이 높은 것은 노인 복지시설, 정신 박약자 원호시설 등이며 아동보호시설, 부인보호시설 등은 오히려 감소하고 있다.

  이것을 기능적으로 볼 경우, 이용시설의 증가가 눈에 띈다는 것, 특히 지역복지센타 등 순수한 지역복지시설의 증설이 두드러진다. 그 운영 주체는 종래의 사립에서 공립의 비중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수용시설을 따로 한다면 그 비중은 대략 7대 3이다. 총체적으로 지금은 역시 수용 시설이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다. 수용시설의 기능에 관해서는 치료, 교육, 훈련 등의 적극적 기능을 강화할 필요성이 새삼 요청되고 있다.

  이상과 같은 일본의 상황은 일단 최근의 사회경제 정세의 변화, 즉 인구 구성의 노령화, 공해, 교통사고, 잦은 노동재해 등의 발생에 따른 장애자의 증가, 사회생활에서 오는 긴장감이나 약물중독 등에 의한 정신 장애자 증대 따위의 변화에 대응하고 있다.

  한편 일본의 사회보장은 종전 직후의 혼란기에 있어서는 전염병의 추방, 높은 유아사망률의 개선 등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보건위생 행정과 건강하고 문화적인 생활을 보장하는 생활보호행정 등이 중심이었다. 그러나 1955년대부터 고도성장을 배경으로 사회보험, 사회복지의 분야에 있어서도 정비․확충이 꾀해져 왔다.

  이 결과 현재 일본의 사회보장은 내용․수준도 서구제국에 비교해도 뒤지지 않게 되었다. 사회보장의 급부수준을 표시하는 사회보장 이전의 대국민소득을 비교해보면, 현시점에서는 유럽제국에 비교해서 반드시 높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것은 주로 유럽제국만큼 인구의 고령화가 추진되어 있지 않다는 점과 연금제도의 미성숙에 의한 것으로 개개의 제도의 수준이 낮다는 것은 아니다.

  금후는 급속한 고령화의 진전과 연금제도의 성숙화에 따라, 이 비율도 급속히 상승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국민의 비용부담을 표시하는 지표인 조세 및 사회보장 부담의 국민소득에 대한 비율은 유럽제국에 비교해서 낮은 수준이지만, 예상되는 인구의 고령화와 연금제도의 성숙화를 전제로 하면 현행 제도의 급부 수준을 그대로 두었을 때 금후 상당한 국민 부담의 증가는 피할 수 없다.

  덧붙여 말하면 노인을 몇 사람이 지원하는가를 보면, 현재는 노인 1명을 5.9명이 지원하고 있지만 2020년에는 2.3명이 지원하는 것으로 된다.

  따라서 우리나라도 본격적인 고령화 사회에 대응하여 사회보장시책이 안정되고 유효하게 기능 하도록 충분히 배려하여야 할 것이다.

  고령화에 대응하는 시책을 몇 가지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선 경제사회 활력의 유지이다. 물가의 안정과 지속적 경제성장은 국민 생활의 안정과 사회보장의 충실에 도움이 되지만 동시에 과잉된 급부는 도리어 경제사회의 활력을 저해하는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자조, 상호부조, 공조의 역할부담이다. 제도 개정에 있어서도 자조의 정신과 상호부조의 정신을 손상시키지 않도록 배려할 필요가 있다.

  그 다음으로 사회적인 공평과 공정의 확보이다. 특히 현역 세대의 부담이 지나치지 않도록 급부와 부담의 공평과 공정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공사의 역할 분담과 제도의 효율적 운영이다. 그때에는 필요의 우선도, 수익과 부담의 바란스 등에 유의하면서 급부의 중점화를 꾀하고 사회보장이 커버할 범위, 수준을 적정한 것으로 설정해 갈 필요가 있다.

  그러면 다음에는 일본의 민간 사회복지의 경향과 문제점을 중점적으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일본의 사회복지는 명치(明治 1868-1912)에서 대정(大正 1912-1926)에 걸쳐 많은 민간 활동가들의 헌신적인 노력에 의해 개척되었다. 전후의 사회복지는 그 주요 부분을 민간 사회복지가 맡아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전후 일본의 민간 사회복지는 서구와 같이 긴장관계를 경험하지 못한 채 자혜적인 방향에서 사회정책, 공적 사회복지를 대체하는 역할을 해왔다.

  민간 지역복지활동으로서의 사회사업협회, 방면(方面)위원, 세틀먼트, 인보관(隣保館), 보육소 등의 사업활동도 전체적으로는 행정을 돕는 연락 조정 혹은 치안유지를 뒷받침하는 방빈(防貧) 교화기능을 맡아서 부국강병의 국책에 호응하여 갔다. 그후 대세는 국가권력에 영합하여 갔다. 그리고 곧 파쇼 체제하에서 침략전쟁에 가담했던 것이다.

  전후 일본의 민간 사회복지는 사회복지의 국가책임이 확립된 가운데 중대한 전기에 직면하였다. 민간시설은 전전(戰前)에는 공립 시설수를 언제나 상회하였으나 전후 공립시설의 급속한 증가에 따라 1956년에 드디어 공립시설이 더 많아지게 되었고, 현재는 총 시설수의 약 1/3까지 낮아졌다. 또 근년에 자치제 재정의 합리화 방책으로서 ‘공설민영(公設民營)’ 방식도 점차 파급되고 있다.

  전후 일본의 민간 사회복지는 뿌리깊은 관존민비의 풍조에서 권력 유착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싸게 먹히는 보조금 행정을 통한 관료 통제하에 종속되어 지역 주민에게서도 어울리기 어려운 존재로 되었다.

  사회복지협의회, 민생위원협의회, 공동모금회 등도 민간 자주조직으로서 지역복지의 민주적 확립을 추진하는 임무를 지니면서도 실제로는 관제 운동화되어 복지행정의 빈곤을 대체하는 측면이 강하다.

  한편 지역주민측에 있어서도 민간 사회복지의 이해가 결핍되어 권리의식에 눈뜬 주민까지도 민간 사회복지를 매개로 하지 않고 직접 행정에 요구하는 경향에 있다.

  서구 여러 나라에서는 민주주의가 성숙함에 따라 민간 사회복지가 시민 속으로 뿌리내려 시민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으며, 그것을 배경으로 공사가 지역복지 속에서 대등하게 제휴하고 공비수조(公費授助)도 당연한 일로 되어 그에 따른 행정의 부당한 간섭과 통제를 받지 않는 것이 상식으로 되어 있다.

  이에 비하여 일본의 민간 사회복지는 독립무수(獨立無授)에 가까운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일본의 민간 사회복지 경향을 거울삼아 우리나라의 민간 사회복지의 앞날은 어떻게 나아가야 할 것인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어려운 현실임을 직시할 때 안이하게 밝은 전망만을 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거꾸로 공적 사회복지만이 문제 해결을 위한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하에서 정책 주체가 앞장서서 사회복지를 충실히 하는 일은 기대하기 어려우며 요구와 공적 대응과의 사이에는 항상 크나큰 갭이 발생하고 있다.

  그래도 사회복지를 전진시키는 힘이 민중의 운동에 있다는 것을 주목한다면 거기에 민간 사회복지의 전개 방향을 확실하게 정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앞으로의 민간 사회복지는 지역복지 속에서 권리로서의 복지서비스를 제공하고, 주민과 함께 복지정책의 빈곤을 비판하여 그 확충을 강력히 요구하는 사회적 세력으로서 스스로를 재건하여 가는 일이 활로를 여는 방향이라고 할 것이다.

  나는 그 방향 설정에 있어서 민간단체의 과제에 대해서는 별도로 하고 여기서는 민간시설의 과제에 대해서만 다음과 같이 4가지 과제로 정리해 보았다.

  첫째 과제는, 지역 복지운동의 거점이 되는 일이다. 민간시설은 재야의 입장에서 주민의 생활권을 지키는 요새를 구축하여 그를 통한 운동의 거점으로서 자리잡을 때에 독자적인 존재 의의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과제는, 당면한 목표로서 공사 격차의 해소에 온 힘을 기울이는 일이다. 시설 이용자의 처우에 공사의 차별이 있다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 최저기준, 위탁비, 시설 정비비 등 공비 부담의 기준을 설정에 맞게끔 인상하기 위해서는 현장에서 적절한 기준을 만들어 제시하고 강력하게 제기하여 가지 않으면 안 된다. 동시에 종사자의 희생․무권리 상태로는 만족할만한 이용자 처우를 기대할 수 없으므로 저임금․중노동 문제의 해결이 급선무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셋째 과제는, 시설 운영의 자주 경험과 개선이다. 시설경영, 운영의 근대화, 민주화의 필요성은 일찍부터 지적되어 왔으나 오늘날 아직도 불쾌한 사건들이 자주 보도되고 있다. 그것들은 재정 곤란에 기인하는 측면도 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설 자체가 개선 노력을 게을리 해도 괜찮다는 것은 아니다. 경영의 사적 혼동, 경영․운영의 미분화, 가족주의적 지배, 보수적 매너리즘 등의 경향은 조속히 극복되어야 한다. 또한 종사자의 연수 참가나 자주적 연구활동의 보장은 물론 노동조건 개선에의 내부적 대응과 시설장․종사자의 공동행동도 중요하다. 종사자의 노동조합에의 결집도 또한 민간시설 근대화에 밑으로부터의 크나큰 원동력이 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만 할 것이다.

  넷째 과제는, 개방된 민간시설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것은 민간시설이 지역에 문호를 개방하여 주민의 생활 속으로 뿌리내리고 스스로를 주민의 것으로 인식하게끔 해나가는 일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 우선 이용자의 조직(부모의 모임, 지키는 모임 등)과 굳게 가슴을 맞댈 필요가 있다. 또한 자원봉사자를 받아들이고 육성하는 일을 중시하여 주민에 대한 끊임없는 계몽활동을 전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더구나 주민운동과의 결속을 다져나가는 일도 오늘날의 과제로 되어 있다. 물론 민간시설이 폭넓은 지역주민의 이해와 지원을 일시에 받기란 매우 어렵기 때문에 서서히 서로의 협력을 기울여 가는 수밖에는 별 도리가 없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 노력을 배경으로 광역 수준의 시설 종별․통일의 자주조직을 강화하여 사회복지협의회․공동모금회에 요구함으로써 자치구․국가에 자극을 주는 일을 강력하게 전개할 필요가 있다.

  이때 단순한 동업자 조직의 이익 옹호활동에 그친다면 이는 결국 권력과 유착된 거래로 끝남으로써 대규모의 국민운동으로 확산될 수가 없을 것이다. 국민의 생활권을 지킨다는 시점에서 광범위한 국민대중과 연대를 맺는 방향으로 민간 자주성․비판성을 관철하여 갈 때 비로소 사회복지가 전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점칠 수 있으며, 그 속에서 민간시설의 새로운 진흥도 바라볼 수 있다고 하겠다.

  다음으로 아동․모자․부인의 복지, 장애자의 복지, 노인복지 등 여러 분야의 사회복지 가운데 최근에 고령화 현상으로 크게 대두하고 있는 노인복지에 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한다.

  일본은 1989년 12월에 후생성․대장성․자치성 3성의 합의로 「고령자 보건복지추진 10개년 전략」을 설정하고 재가복지․시설복지 등의 사업 달성가능성 등에 대해서 논의를 집중,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10개년 전략을 달성하는 것을 기본으로 각종 시책을 강력하게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있다.

  또 10개년 전략을 추진하기 위해 노인복지법을 개정하고(1990년 6월 설립), 1993년도부터 입소조치권을 도도부현으로부터 정촌으로 이양함과 동시에 전시정촌 및 도도부현(그러나 현내의 구역 마다에) 노인보건복지계획을 책정하기로 했다.

  여기서 나는 노인문제에 대하여 오늘날 어떠한 대응책을 취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

  먼저 노인층의 소득보장으로서 혼자서 생활할 수 있는 금액의 연금제도를 확립해야 할 것이다.

  노동조합의 운동은 임금 인상 투쟁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다. 오로지 기업내의 노동조건 개선이 조합의 중심과제가 되어 정년퇴직 후의 보장에 대해서는 투쟁이 뒤지고 있다. 총자본과 국가는 노동자의 노후생활에 대해서도 당연히 보장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일본의 종신고용 형태는 독특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나 실제로는 정년까지의 고용으로서 종신이란 이름에는 걸맞지 않다. 노인이 자활할 수 있는 연금제도가 확립되었을 때에 오늘날 노인문제의 기본적인 부분이 해결된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또 각 기업에 있어서의 정년제 철폐가 요구된다. 정년제에 의해 기계적으로 경험과 기술, 기능에 숙달된 고령 노동자를 직장에서 쫓아버려서는 안 된다. 오늘날은 영양, 의료, 지적 노동의 발달에 따라 정신연령은 오히려 젊어지고 있다.

  연공 서열형의 임금체제가 정년제를 취함으로써 고용자측에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정년제는 일할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며, 정년제의 이론적 근거는 전혀 없다고 하겠다.

  취로의 자유는 일할 사람의 자유의사에 따라 결정될 문제이다. 육체 연령에 의한 정년제를 없애야만 고령 노동자의 취업문제는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노인의료의 보장을 완전하게 실시하는 일이 필요하다. 노인의학은 의학분야에서 뒤떨어지고 있다. 각 지방자치제는 국가의 시책에 앞서서 노인의 무료진료제도를 확립하기 시작하고 있으나 노인의료는 의료비를 무료로 한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노인 질병의 조기발견, 조기치료, 기능 회복의 치료제도가 정비되지 않는 한 누워 일어나지도 못하는 노인의 비극은 사라지지 않는다. 방문진료, 왕진체제가 지역사회의 의료대책으로서 확립되지 않는다면 의료보장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의료 케이스 워커, 보건부에 의한 적극적인 지역의료의 계획, 의사와 간호원에 의한 재택노인에 대한 왕진체제의 수립, 의료 기관과의 제휴 등이 원활히 진행되지 않는다면 노인의료의 성과는 기대할 수가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 노인에 대한 주택보장이다. 노인을 위한 주택이 건설되고는 있으나 단신 노인을 위한 쾌적한 주택이 그 수용에 맞게끔 제공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날 젊은 핵가족의 확대는 반면에 노인세대의 확대도 나타난다.

  저임금과 협소한 주택에서 생활하는 젊은 핵가족은 부모를 부양할 물리적 조건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 며느리와 시어머니, 부모와 자식의 갈등은 부양능력의 저하에 의해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

  가족의 부양능력 결여는 가족원의 분리와 붕괴를 초래하게 된다. 노인이 스스로의 거주지를 보장받음으로써 그 인격적 사회적 입장이 안정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노인에 대한 사회복지 서비스를 충실하게 해야 할 것이다. 각종 노인홈, 자원봉사자 활동, 노인클럽 등 기존의 복지 서비스 실책 및 활동은 지역사회의 노인생활 요구에 맞게 확충하고 전문화하는 일이 당면한 과제라 하겠다.

  시설수용 방식에 의한 복지 서비스보다 재택 서비스 방식이 주목되는 경향이 엿보이고 있으나 이들은 함께 충족되어야만 할 문제이다. 노인복지 서비스를 재택방식에 중점을 두고자 하는 일은 기존 시설을 경시하기 쉽다. 노인시설의 중요성은 이제 두말 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

  시설내의 처우를 전문화하고 쾌적하게 하는 일이 선결문제이다. 시설 처우를 지금과 같이 낮은 상태 그리고 방치한 채로는 재택서비스가 충족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시설생활이 적어도 자택에서 생활하는 것보다도 쾌적하게 되지 않는 한 노인의 인권이 보장되지 않을 것이다.

  이상의 것들은 지역사회의 노인문제 대응의 지표로서 꼭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끝으로 사회복지제도가 효율적이 되려면 적어도 국가적 차원에서 원칙이 뚜렷이 세워져 있어야 하고 그 전달체제나 서비스의 기능에 합리성이 부여되어 있어야 한다.

  특히 개발도상국가에 있어서는 사회복지제도는 그 나라의 경제 사회개발계획의 테두리 안에서 기능이 발휘하는 체제로 정립되어야 한다. 또한 유의해야 할 점은 사회복지의 일반적 관념과 모형을 정립함에 있어서 인권이나 사회복지 서비스 수혜자의 생활조건에 관계되는 윤리적인 면에만 너무 집착해서도 안 될 것이다.

  일본같은 나라에서 ‘사회 복지의 방향을 재고하자’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사회복지가 인기에 영합해서 시세에 따라서 충동적으로 만들어지던 시대는 지났다는 인식을 새롭게 한 때문이다. 일본의 사회복지 서비스는 그때 그때의 분위기의 영향을 받아 불투명한 슬로우건만 내걸고 수 많은 프로그램이 혼란에 휩싸여 상호간에 조화를 잃고 있었으므로 이를 개선해 보고자 하는 것이 사회복지의 방향을 재고하자는 내용이다.

  따라서 일본은 사회복지 계획이 전체 사회정책의 일환으로 적절한 위치를 차지함으로써 계획성 있게 발전할 때가 도래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와 같은 일본의 예는 개발도상국에게 특히 교훈을 준다.

  우리가 일본의 모습을 보면서 감정에 치우쳐서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이러한 일본의 사회복지 동향을 거울삼아 우리나라의 복지정책에 주체적으로 수용 보완할 필요가 있다. 사회복지에 대한 국민 모두의 관심과 노력이 개개인의 풍요로움과 국가의 발전에 이바지 할 것이다.


일본 통산성의 실체


 멀고도 가까운 사이


  우리는 일본을 얘기할 때 ‘멀고도 가까운 나라’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이는 아마 일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는 지리적으로는 가장 가까운 이웃이지만 역사적으로 많은 불행한 관계를 맺어왔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일본의 대한 감정을 ‘혐한(嫌韓)’이라고 말하고 우리의 대일 감정은 ‘반일(反日)’이라 한다.

  그러다 보니 우리 사회는 언제부터인가 일본의 피상적인 결과는 인정하면서도 그 결과의 원인이 되는 의식과 강점에 대해서는 드러내놓고 자신있게 이야기하지 못하는 분위기가 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일본 경제는 단연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거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경쟁력은 어디서 왔는가. 우리나라의 공무원들은 연일 언론과 국민으로부터 비난을 받는데 반해, 일본의 경제 정책을 만들어내는 일본의 거대한 관료집단인 통산성의 관료들은 우리나라 공무원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한다.

  일본의 기업과 공장은 노사분규 없는 가족같은 분위기가 정착되어 가고 있으며 한 우물만 파는 국민의식으로 인해 엄청난 기술이 축적되었다. 또한 일본인들은 졸부가 과소비나 조장하는 등의 사회의 병폐를 일으키지 않으며, 자기의 분수를 알고 ‘내’가 아닌 ‘우리’라는 집단 의식 속에서 자기 몫을 묵묵히 다하며, 자신의 불행은 자신의 팔자로 알되 국가에 대한 불만으로 돌리지 않는다.

  위에 전술한 것처럼 일본으로부터 우리가 배울만한 것은 많다. 정말 어느 기업인의 독백처럼 ‘일본은 얄미울 정도로 잘하고 있다’.

  그러면 과연 우리는 할 수 없는가. 바로 이 ‘우리도 할 수 있기 위해서’ 우리는 일본인의 좋은 의식과 강점 그리고 ‘일본 경제의 전문 경영자’라 할 수 있는 통산성을 배움으로서 일본을 더 많이 알아 일본을 단순히 영원한 적수가 아닌 공존번영의 먼 미래의 동반자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흑자경제(黑字經濟)


  일본 경제는 1992년 8월 28일 경기종합대책 발표 때만 해도 93년초 부터는 민간 설비투자와 소비가 증가하여 경기가 회복 국면에 접어들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그러나 당초의 예측과는 달리  93년도 하반기까지도 좀처럼 긴 불황의 터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세계의 모든 국가의 부러움을 사면서 경제 성장의 고속도로를 달리던 일본에게 있어서 이번의 불황은 74년 석유파동 이후의 최대 불황이어서 마이너스 성장에까지 몰릴 처지가 되었다.

  이에 당황한 모리히토 내각은 93년 9월 급기야 긴급 경제대책을 내놓기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이러한 불황도 세계 다른 국가의 경제성장과 지금까지의 고속성장을 감안한다면 불황의 나락으로 빠진다고 보기보다는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일종의 ‘충격’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일본의 각종 연구기관들도 약간의 긍정적인 연구결과를 계속 발표하고 있다.

  일본 경제의 고민은 불황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불황 속에서도 자꾸만 늘어나기만 하는 무역 흑자 문제이다. 불황이 장기화되면서 수요 감퇴로 인해 수입은 늘지 않는 반면, 수출은 각 기업이 불황 타개책으로 수출에 대한 노력을 배가하여 상대적으로 증가를 계속함으로써 오히려 무역수지 흑자의 양을 증가시키고 있다. 이는 엔고에도 늘어만 가는 무역적자를 지켜보고 있는 미국에게 초조감만 더해줌으로써 항상 엔고의 공세가 거세질 우려를 안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전도양양하던 일본 경기가 왜 갑자기 악화되었나. 여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복합 불황론’이 가장 우세한 것 같다. 이는 헤에세에(平成) 때에 금융완화가 지나쳐서 지가나 주가의 투기적인 급상승 즉 거품이 발생했는데 이런 거품은 당연히 언제까지 지속될 수 없어서 90년 들어 주가가 먼저 폭락했고 이어 지가도 급하락했다.

  그 결과로 기업은 활력이 약해지면서 성장이 감속하고 재고와 설비는 과잉 상태가 되어 불황에 빠져들었다는 것이다. 그후 일본 정부는 잇따른 긴급 경기대책과 각종 정책을 발표했다. 그러나 경기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은 채 집권당인 자민당의 38년 아성이 무너지면서 정권 교체에 따른 정국 불안 요인이 겹치면서 경기 불황이 장기화될 조짐까지 보이고 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무역 흑자는 증가만 하는 것인가. 첫 번째는 엔고를 중심으로 한 소위 J커브 효과에 의한 명목상의 흑자증가라고 보는 견해이다. 곧 급격히 엔고가 되면 수출기업으로서는 엔화표시 수입금액이 점차 줄어가기 때문에 일시적으로는 재빨리 대응이 가능한 수출 가격을 인상한다는 것이다. 결국 달러 베이스의 수출 금액만 늘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일단 한 번 엔고가 시작되면 이에 의해 경상수지 흑자가 커지게 되고 커지게 된 흑자는 다시 엔고를 진행시키는 ‘엔고가 엔고를 부르는’ 악순환 과정을 밟게 되는 것이다.


  특수경제(特需經濟)


  두 번째 요인은 일본과 해외의 경기 순환의 주기차에 따라 발생하는 소위 특수라고 보는 견해이다. 이는 일본 경제로는 국내 경기의 후퇴와 함께 거품 경제가 붕괴됨에 따라 내수가 급격히 줄어들게 되어 수입은 감소될 수밖에 없는 반면 수출은 이러한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기업의 노력은 물론 해외 시장 여건도 일본의 주력 시장인 미국을 위시해서 중국과 동아시아 등의 경기가 지속적으로 확대해 가는 추세이기 때문에 증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끝으로 구조적 요인을 들 수 있다. 이는 일본 경제 및 국민 생활의 구조적 특성상 미국, EC를 비롯한 주요 교역국간의 산업 및 무역 연관 관계 때문에 일본의 무역흑자 발생은 필연적인 결과라고 보는 것이다.

  일본의 수입 구조는 기본적으로 제품보다는 식료품 및 원재료의 수입이 주류를 이루는데 반해 미국, EC 등과는 산업 종속론까지 얘기될 정도로 기계류의 대일 의존이 심각한 구조적 역학관계에 있다. 물론 이와 같은 현상은 위에서 설명한 이론적 접근만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며 오히려 경제 외적인 측면 즉 일본인의 역사적 문화적 측면과 의식 및 형태를 종합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바람직한 접근일 것이다. 예를 들어 일본은 초등학교 때부터 일본제품이 세계에서 제일 좋은 제품이라고 가르치는 등 일본 것을 아끼고 사랑하는 일본인 특유의 의식이 제조와 무역 등에서 배타적인 환경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일본의 이러한 경제적인 힘을 발생시키는 요인은 무엇인가?

  첫째로 일본의 기업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경영 관리에 임하는 독특한 일본형 경제모델을 갖추고 있어서 기업 경영의 효율이 높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기업을 중심으로 하는 기술개발력이 높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술력은 일본을 ‘자원 빈국’으로부터 ‘인공자원 대국’으로 변모시켰으며 이는 앞으로도 일본 경제를 선도해 갈 것이다.

  셋째로는 국민의 교육 수준과 정치의 안정을 들 수 있다. 정치 불안은 사회 불안을 낳고 다시 사회 불안은 경제 활동의 저해라는 악순환을 낳는데 오히려 정치의 밀월 관계는 경제 성장을 도왔다는 것이다.

  넷째로는 전체적으로(타 선진국에 비해) 일본의 행정효율이 높다는 것이다.

  전술한 일본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지금 엄청난 일본병을 앓고 있다. 일본형 경제발전 모델은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지만 모범적인 모델로 보기에는 뭔가 좀 어색한 감이 있다. 국가는 풍요로우나 국민은 가난해서 성장의 사회적 분배에 실패했다는 지적도 많다. 곧 구조적인 병 즉 일본병에 걸렸다는 것이고 이는 물론 기본적으로 부의 분배 행정의 실패에 기인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일본병의 원인 곧 구조적인 문제를 제시하자면 첫째, 관청의 부처 이기주의인데 이는 극단적인 중앙 집권주의를 가져와 도쿄 중심형의 발전을 이뤘으며 토지, 주택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없었다.

  둘째, 공공사업 및 농정에 있어서 정계, 관계, 업자가 ‘정관업 삼각관계’라고 하는 유착관계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공공사업 부문간 배분이나 토지 이용이 경직화되는 등의 문제를 야기시켰다.

  셋째, 국민 생활의 비전을 제시하는 건전한 야당이 없다는 것이다.

  넷째, 언론의 자유가 없다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일견 자유로운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진정한 의미의 언론의 자유가 없다.

  다섯째, 사회적인 폐쇄성인데 이는 회사는 물론이고 상표까지 지정되어지는 계열 거래와 지역 또는 업종별 폐쇄적인 관행과 인습이 국제화를 제약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일본주식회사


  지금까지 일본의 경제상황, 경쟁력, 무역수지, 일본 시장(외국에서의), 국민생활, 국민의식 등을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이제 이 일본의 경제를 총지휘하는 통산산업성(통산성)에 대해서 알아보자.

  ‘일본 주식회사의 참모본부’로서 산업 정책을 구사해 왔고 또 그에 의해 일본 경제 약진의 견인차로 자부해온 관청인 통산성은 1949년 5월 발족하였는데 곧 전후파 관청인 것이다.

  일본 통산성이 전후 착수한 최초의 사업은 산업 합리화였다. 전쟁을 치르는 동안 대부분의 시설이 노후화 되어 시설 대체 등을 통한 산업화는 필수였다.

  내용은 1)기업 세제 우대 2)국가 자금 배분 기구의 창설 3)도로 항만 등의 기반 시설의 정비를 위한 재정자금의 중점적 투하 4)기술 개발을 위한 지원 5)전원 개발에 의한 에너지 비용 부담의 경감 6)자산 재평가에 의한 자본 축적 등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러한 산업 정책과 정책 수단들이 적극 활용되어 일본의 합리화가 진척되고 설비투자 의욕을 높여온 것은 사실이지만 왕왕 일본의 산업 정책은 산업 보호와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소위 관민일체의 일본주식회사라고 하는 폐쇄적인 체제는 외국으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래서 민간의 발전과 고도 성장기 산업의 다양한 발전은 항상 정부의 산업 정책의 주도에 의해 전개되어 온 것 같이 인식되기도 한다.

  이러한 통산성은 일본 내각에서의 위치도 상당해서 외무성, 대장성과 함께 3대 성 중의 하나다. 경제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대외적인 면에서도 통상 외교의 전담 부처로서 상당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물론 최근에 와서 통산성의 업체에 대한 절대적이었던 영향력이 다소 퇴색하면서 그에 대한 평가도 달라지고 있지만 아직은 일본 국민의 마음속에 심어놓은 그 인상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 후 1952년 통산성은 지금까지의 집행부 부처에서 기획과 정책 결정 중심의 부처로서 변신했는데 이의 계기는 ‘기업 합리화 촉진법’의 제정이었다. 왜냐하면 기업 합리화 촉진법은 이름 그대로 조장입법으로서 당시의 어려운 여건상 정부의 지원을 갈망하던 기업의 욕구와 합치된다는 점과 함께 이 법이 계기가 되어 통산성의 이미지를 규제 중심으로부터 조정과 정책 중심의 이미지로 변신시켜주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항상 꽃밭을 걸어온 건 아니었다. 예를 들면 ‘특정 산업 진흥 임시조치 법안’을 실행시키는 과정에서 대장성과 은행으로부터 금융의 영역을 침범한다는 이유로, 또한 관청가의 최대 라이벌 관계인 대장성과 통산성간의 견제 심리도 작용해서 격렬한 반대를 받았다. 그리고 경단련도 정부 주도의 조정이나 간여보다는 업계의 자율에 맡겨야 한다는 논리였고 공정거래위원회는 이 법안이 제정될 경우 독금법이 유명무실화된다는 이유로 반대했으며 야당은 경제 헌법(독점 금지법)의 몰락이라고까지 몰아세웠다. 그래서 어느 정도 중간 선에서 타협했지만 사실상 통산성의 승리라 보아야 할 것이다.

  그 후 통산성은 자동차, 조선 등 여러 산업 합리화 과정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업체로부터 엄청난 반대와 이탈을 받았지만 통산성의 협조적이고 포용적인 행정지도를 정착시킴으로써 정부와 기업의 관계를 대립의 관계가 되는 것은 피할 수가 있었다.

 

  제3차 침략의 대비


  일본 통산성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우리도 그들의 장점을 우리의 제도에 흡입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무엇보다도 일본에 대한 우리의 개인 인식부터 일신해야 한다. 그런 토대 위에서 배울 것은 과감히 배우고 시행 착오가 될 만한 것은 사전에 이를 제거해 소위 후발성 이익을 최대한 향유해야만 할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토대 위에서 지금의 우리의 시각에서 볼 때 일본 경제의 특징적인 강점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첫째 일본 경제 발전의 주체로서 통산성의 역할과 그 위상에 관한 것이다. 사실상 경제 정책과 관련한 경제 부처는 대장성과 통산성이 있는데 대장성은 세제, 금융 및 예산기능이라는 막강한 힘을 갖고 있는데 반해 통산성은 일본 유일의 실물 경제 부처이자 산업 정책을 사실상 독점하는 명확한 선을 긋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통산성의 입장에서는 대장성과의 협의만 거치면 통산성이 의도한 대로 경제 정책을 주도할 수 있는 입장에 있다는 점이다.

  둘째로는 정부 특히 통산성과 업계의 관계에 있어 관민협조 방식이라고 하는 독특한 신뢰와 협력관계를 이룩했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기본적으로 통산성이 ‘한 발 앞서가는 자세’로 정책과 제도 그리고 중장기 비전들을 끊임없이 생산해냄으로써 업계를 선도해 왔다는 점과 이를 믿고 따라왔던 업계가 결과적으로 항상 통산성의 정책이나 지도가 옳았다는 인식에서 우러나온 상호믿음 관계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다음은 통산성 자체의 운영의 강점인데 우선 통산성 내에서의 정책 결정 시스템을 꼽을 수 있는데 통산성의 모든 정책은 ‘법령심사위원회(주 2회 개최)’ → 총무과장 회의 → 성의(국장급 과장회의)의 심의 절차를 거친다.

  다음은 인사에 있어서의 투명성과 예측 가능성인데 각 직무별로 우선 순위와 인사 기준이 정해져 있어 이에 따라 객관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끝으로 일본 경제의 강점으로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정부가 그리고 그 중에서도 통산성이 경제 정책과 산업 정책을 펴나가는데 있어서 그것을 수용하고 실제 집행하는 기업과 일반 국민의 의식이 정부 정책의 당위성을 인정하며 아니 더 적극적으로 앞장선다는데 있다.

  앞으로도 일본 통상산업성은 그때 그때의 시대적 상황에 따라서 정책과 비전 그리고 각종 정보의 제공을 통해 지금까지의 그 위치를 계속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도 빠른 시일 내에 미국적 자유방임주의도 아닌 일본식 ‘일본주식회사’도 아닌 우리 나름대로의 독특한 ‘국가 경제 발전모델’을 정착시켜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우리는 2차 대전의 패전과 더불어 맞게 된 많은 시련, 그 중에서도 가장 절박했던 경제적 빈곤을 딛고 일본이 어떻게 오늘날 세계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하게 되었는지? 그들은 무엇을 생각하며 어떻게 처신해 왔는지? 등을 깊이 있게 연구해 봐야 할 것이다. 또한 엄청나게 많은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정치적 편견이라든가 소극적 세계관을 떨쳐버리고 과감히 세계의 물결을 주도해야 할 것이다.


일본은 일어난다

‘까아악 까아악’


  최근 일본에 잠시 다녀오는 길에 못 볼 것을 몇 가지 보고 와서 토해 버리려고 한다. 첫날 아침잠을 깨워준 것은 까마귀 우짖는 소리였다.

  ‘까아악 까아악 까아악 깍 까르르르 까아악…….’

  세상에서 가장 불길하다고 하는 새 중에 까마귀를 가장 우두머리로 꼽는 것이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인데 아침부터 이 불길한 새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은 나로서는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창문을 열고 소리나는 쪽을 둘러보았다. 한두 마리도 아니고 떼를 지어 앙상한 나뭇가지에 앉아 이국 땅에 처음 온 이 여행객을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 음흉스럽기 짝이 없었다.

  “여긴 웬 까마귀가 저리도 많소? 언제나 저 모양이요?”

  “여기서는 까마귀를 길조라고 해서 울음소리도 상서롭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통역을 맡은 이가 까마귀에 대한 이곳의 인식을 귀띔해 준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알았는지 가장 먼저 찾아들고, 무덤가를 맴돌면서 썩은 고깃덩어리만 있으면 아귀같이 달려들어 뜯어먹는 음흉한 날짐승을 여기서는 길조라고 한다니. 내가 지금 있는 곳이 한국 땅이 아니고 일본 땅임은 분명한데 사람이 사는 곳에 있는지 유령이나 도깨비들이 모인 곳에 있는지 잠시 아리송한 느낌이 든다.

  “옛날부터 왜인(倭人-일본인들은 예로부터 이렇게 칭함)들은 자기네들끼리도 서로 싸움을 즐겨서 칼로 찌르고 베는 것을 무사도라고 하면서 찬사를 보낼 뿐 아니라 이웃 나라 사람들까지 노략질하면서 살상을 밥먹듯 하여 무고한 생명들을 헤쳤기 때문에 그 원혼들이 까마귀가 되어 자나깨나 원수갚을 궁리만 하느라고 새벽부터 우짖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지 않아도 저놈들이 애써 지은 밭농사를 망치기도 한답니다.”

  “아마 그럴 것이오. 언젠가는 당신네들이 죽으면 그 시체라도 갈기갈기 찢어먹으려고 몰려다니며 원한 서린 울음으로 울부짖는지도 모를 일이요.”

  “이 선생은 일본인에 대해서 감정이 많으신 모양이군요.”

  “단순한 충고라고 생각하시오. 좋은 이웃이 되기를 바랄 뿐이니까요.”

  장차 일본은 까마귀 울음을 전주곡으로 해서 억울하게 목숨을 빼앗긴 원혼들로부터 보복당하게 될 것이라는 예감이 불현듯 스친다. 인과응보라는 것은 때와 장소를 초월해서 어김없이 이루어지고야 마는 것이 세상의 철칙이라고 하는데 언젠가 일본에 이러한 피바람이 불어닥칠 것만 같은 이 예감은 그냥 끝나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본다.

  일본의 지도를 언뜻 보면 마치 굶주려 뼈만 앙상한 여우가 긴 꼬리를 휘저으며 대륙으로 슬그머니 접근하려는 모양을 하고 있다.

  예로부터 왜인들은 한반도를 비롯하여 대륙의 해안을 침공해서 먹고 살아왔는데 이들을 해적이라고 했다. 그들은 자기네들이 사는 땅이 사람이 살기에는 어려운 척박한 땅이라는 것을 알고 불안과 공포에 질린 종족의 속성이 작용하여 남의 땅을 음흉스럽게 탐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직도 이러한 생각을 가진 집단들이 살아남아 꿈틀거리고 있다.

  일본열도는 지리학상으로 매우 불안정한 위치에 있으며 그 지반도 매우 취약해서 마치 잿덩어리가 간신히 뭉쳐져 있는 것과 같다고 한다. 언젠가는 태평양 깊은 파도에 밀려서 녹아 없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일본의 땅덩어리는 화산재가 쌓여서 만들어진 현무암과 석회암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잿덩어리인 것만은 틀림없는 것이다.

  그날도 일본의 텔레비전은 연일 지진에 대비한 비상계획을 발표하고 계몽하느라고 바빴다. 지진은 일본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소나기 오는 것 정도로 자주 있는 일이라서 언제나 이에 대비한 훈련을 해 두어야 한다. 지진의 피해는 실로 어마어마해 일본인은 지진에 대한 공포심이 대단하며 항상 심각하게 경계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일본 곳곳에는 소위 명승지라 하는 곳이 많이 있는데 대개는 온천이 있고 유황 타는 냄새와 함께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나는 휴화산 지대이다. 이즈반도 부근에 있는 섬은 곧 화산폭발이 있을 것 같아서 주민을 대피시킨 곳도 있어서 사람이 마음 푹 놓고 살만한 땅은 결코 아닌 곳이다.


지장보살(地藏菩薩)


  일본열도는 아마 지장보살님의 알뜰한 공덕으로 겨우 명맥을 부지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동경을 비롯해서 일본의 시골 곳곳에는 크고 작은 절이 수없이 많이 있는데 대개는 지장보살을 모시고 있다.

  지장보살은 부처의 지시를 받아 장차 미륵불이 나타날 때까지 땅 위에 살고 있는 생물을 통틀어 보살피는 임무를 맡은 보살이다. 특히 일본 같은 열악한 땅 위에서 사는 중생들은 이 지장보살의 도움 없이는 한시라도 목숨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열심히 모시고 두 손이 닳도록 빌고 또 비는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에도 절이 곳곳에 있기는 하지만 지장보살만을 모시고 있는 곳은 없다. 대개 미륵불이나, 아름답고 인자한 모습의 관음보살을 모시고 있는 곳이 많은 것을 보면 이러한 차이점은 매우 대조적인 풍토라 할 수 있다.

  삼대에 걸쳐 가업을 이어오고 있다는 일본인 인텔리 집을 찾은 일이 있다. 그의 정원에는 우리의 산야나 공동묘지에서 볼 수 있는 망부석이나 돌비석들이 널려 있고, 귀중품이라고 아끼는 골동품들을 보면 대개 무덤에서 꺼내온 것들이어서 침실이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무덤 속에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이 즐겨 먹는 음식 중에는 버섯 종류가 많다. 별의별 버섯이 다 있어서 푸른 채소만 즐겨 먹는 우리의 식생활과는 매우 달라 마치 땅 위와 땅 속의 차이인 것 같아 기분까지도 미묘해진다.

  “당신의 외모는 우리와 흡사해서 반도로부터 건너 온 그 일부라고 보는데요?”

  “아닙니다. 우리는 원래 일본 사람입니다. 이제 와서 반도에서 왔다고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 집안에 있는 귀중한 소장품들은 반도에서 가져온 것이 대부분인데… 그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이것은 대대로 내려온 우리 집안의 가보입니다. 빼앗아 온 것은 아닙니다.”

  “왜 조상의 신주를 서쪽에다 모시고 서쪽을 향하여 절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죽은 조상이 모두 서쪽으로 갔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대로 내려오는 풍습이라 그 내력은 알 수 없습니다.”

  나는 그에게 계속 질문하는 것이 짓궂다고 생각되어 골동품이나 감상하였지만 물건에서 으스스한 기분이 들고 별 흥미도 없었다. 여우도 목숨이 다한 때는 고향이 있는 곳으로 머리를 향하고 죽는다고 하는데 뿌리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그의 삶이 한낱 물위에 떠도는 개구리나 뱀과 같아서 습생(濕生)에 머물러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나무지장보살(南無地藏菩薩)……. 아직도 육도(六道)의 사생(死生) 중에 습생(濕生)에 머물러 방황하는 불쌍한 이들의 몰골을 다시 주물러 인자스런 사람으로 만들어 주소서.’

  나무관세음보살


  쫓기는 토끼처럼


  오래 전부터 우리와 일본은 전쟁상황에 놓여 있다고 나는 생각해 왔다. 요즈음 우리 주변에는 소위 ‘범죄와의 전쟁’에 한껏 골몰하고 있느라고 느끼지 못하는지 모르겠지만 이러한 전쟁보다도 더 처절한 전쟁이 진행중에 있음은 사실이다.

  무사와 안일에 탐닉하여 전쟁이라는 말이 두려워서 이를 은폐하려고 하는지 모르지만 그 심각성을 파헤쳐 보면 그냥 무관심하게 넘길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마치 토끼가 쫓기다가 마지막에는 구멍 속에 머리를 처박으면서 사냥꾼이 모르고 지나가기만 기다리는 형용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이 전쟁은 칼이나 창을 가지고 다투는 싸움이 아니며 총이나 폭탄을 가지고 힘겨루기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전쟁은 옛날 전쟁 형태에 불과한 것이다. 이제는 그런 유치한 무기로서 전쟁을 할 수는 없으며 국제규약상 많은 제약을 받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다만 국제적으로도 묵인되고 있는 전쟁방법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데 이것이 곧 경제전쟁이라 하는 것이다. 경제전쟁의 피해는 칼이나 창으로 하는 싸움보다 더 잔인할 뿐 아니라 폭탄이나 탱크보다도 더 격렬한 전쟁인 것이다.

  일본은 현재에도 칼이나 창보다 더 예리한 무기인 경제라는 면도칼로 우리의 가슴을 도려내고 있다. 폭탄이나 탱크보다 더 위력 있는 힘으로 우리의 혼을 노략질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아픔을 느끼는 것 중에는 두 가지가 있다.

  육신의 아픔은 느낌으로 알지만 마음이 아픈 것은 촉감으로 쉽게 느끼지 못하나 육체의 아픔보다 더 뼈저린 아픔인 것이다.

  몽유병 환자는 제발로 걸어가지만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간혹 ‘돈’이라는 마약에 취하면 몽유병자 이상으로 정신이 혼미해져서 누가 슬그머니 심장을 도려내고 오장육부를 훔쳐가도 아픔을 모르게 되는 수가 있다. 돈에 대한 매력을 맛본 사람은 더 많은 돈을 위해 자신의 양심을 팔아 버리기도 하지만 이 병의 특징은 그 아픔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금의 경제침략은 4백년전 임진왜란 때보다 더욱 포악하고, 1백년전 합방 때보다도 더 악랄하지만 당장 쓰라린 아픔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 원인은 한결같이 돈벌이에 눈이 멀고 감각이 둔해져서 깨닫지 못하는 것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일을 우리 민족이 그것도 왜인들에 의해서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비슷한 몰골로 당하고도 토끼처럼 잘 잊어버리는 민족성 탓인지 돌아서면 금방 까먹고 희희낙락 돈 쓰기에 열중하느라 자기 콩팥 뽑아 가는 줄 모르고 있다.

  왜인들이 이 나라 강토를 침략한 행위는 가야, 신라, 고려 시대를 거쳐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렵다. 어느 때는 굶주린 야만인의 형용으로, 또는 해적의 모습으로 노략질했다.

  그러나 1592년 초여름에 평화에 잠든 이 강토를 침략한 임진왜란에 비하면 한낱 도적질에 불과하였다.

  이때 나라의 책임자들은 이 엄청난 난리를 앞에 두고도 이를 알지 못했으며 설사 부분적으로 짐작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짙게 깔린 안일과 타락 속에서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국을 다녀 온 사신들조차도 이 위기상태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해 우왕좌왕 했으며 전쟁을 예고한 선각자에게는 오히려 태평성대를 모독한 죄인으로 몰아서 벌을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왜인의 대장 풍신수길은 전쟁을 위한 준비를 착착 진행시켰으며 이 땅에 있는 위정자들은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고 장차 엄청난 국난이 다가옴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임진왜란의 경우처럼 지금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엄청난 침략을 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처 침략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지 않고 구멍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토끼처럼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그때나 지금이나 수백 년의 세월을 달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의 정황과 너무도 흡사하다.


註 육도(六道) :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수라(修羅), 인간(人間), 천                  상(天上) 등 여섯 가지 주어진 운명.

    사생(四生) : 사람같은 태생(胎生), 새와 같은 난생(卵生), 뱀과 개구리 같은                  습생(濕生), 신선과 같은 화생(化生)을 말한다.


캄캄한 한밤중에


  임진왜란을 제 1차 왜란이라고 본다면 제 2차 왜란은 을사보호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다음 국제적인 이점을 악용하여 이 나라를 병탐해 버린 한일합방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조총과 칼을 앞세우고 우리 동족의 귀와 코를 전리품으로 베어 갔었다. 그때 우리는 엄청난 난리를 겪은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지만 이미 금수강산은 불타 버리고 연약한 아녀자는 겁탈되고 포로로 잡혀간 뒤였다.

  한일합방이라는 치욕 역시 군함과 폭탄을 가지고 쳐들어 왔지만 우리는 싸움같은 싸움 한 번 못해보고 고스란히 강토를 빼앗겨 아까운 젊은이들을 대리전쟁의 총알받이로 보내고 정신대로 뽑혀가서 심심풀이로 먹이사슬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어쩌다가 다행히 해방이 되기는 하였지만 아직도 그 흔적이 사무치게 남아 있다.

  한일합방 당시에는 임진왜란처럼 시끌벅적하게 싸움 한 번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나라를 빼앗겼다는 것이 다른 점이라면 다르다고 볼 수 있으나 요즈음의 경제전쟁과 흡사한 점이 많다.

  한일합방 당시에는 밖에서는 왜놈들이, 안에서는 오적과 칠적이라는 도적놈들이 안팎으로 설치면서 도장을 찍어주고 매매계약을 서둘렀기 때문에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나라를 빼앗긴 것이다. 나라가 왜놈들에게 빼앗겼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의병들이 도처에서 나서기는 했지만 겨우 노루 잡는 화승총 몇 자루로 당시에는 신무기라는 대포를 상대로 싸웠다고 하니 이는 달걀로 바위 치는 격이었다. 이때에 애국자는 모두 희생되고 쓸모 없는 것들만 살아 남아서 목숨만 겨우 연명하기 바빴던 것이다.

  그러느라 왜놈에게 붙어사는 이도 있었고 나라밖으로 도망가서 타국 땅에서 설움을 받고 살아가는 이도 있었던 것이다.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나라를 도둑질 당하고 이름 모를 산골짜기에 주인 없는 밭두덩을 의지하며 캄캄한 한밤중에 별을 헤이기 반백년.

  만주벌, 시베리아, 머나먼 미국 땅에 도망가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래도 몸고생 정도 한 것이 고작이겠지만 떠나지 못한 허약한 사람들은 글도, 말도, 성명도, 조상도, 생명도, 재산도, 간도, 쓸개도, 콩팥도, 허파도 모두 내어주고 살아야 했다. 억지로 그들의 모습대로 닮아가도록 채찍질 당하면서 살아야 했던 것이다.

  여섯 살 짜리 나도 산골짝을 오르내리면서 소나무 고목에 붙어 있는 관솔을 따다 주어야 했다. 학교에는 왜놈 말을 하지 않으면 시도 때도 없이 벌을 서야 했으며 변소 청소는 도맡아 놓고 해야만 겨우 눈치껏 살 수가 있었다. 전쟁 말기에는 장정들을 뽑아 학교에 모아놓고 군사훈련을 한답시고 학교까지 빼앗겨 길거리나 들판에서 공부하기도 했으며, 왜놈들의 ‘아마데라스 오미까미’ 귀신을 믿으라고 강요당했고, ‘고곡꾸 신민노 세이시’를 뜻도 모르면서 조석으로 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참으로 암울했던 시절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숨이 막히는 이 시절 나는 어머님으로부터 ‘가갸거겨’를 배웠다. 이 글이 우리의 글인 ‘한글’이라고 말씀하지 않고 무조건 외어두라고 강요할 뿐이었다. ‘가다가나’도 몰라 학교에 가면 설움을 받는 나에겐 오나가나 억울한 생각만 들었다.

  어머님은 뒷방 구석에 나를 가두어 두고 이 글을 가르치셨다. 늘 인자하시기만 했던 어머님께서는 이 글을 가르쳐 주시는 때만은 엄숙한 표정을 지으시며 나가 놀기만 하려는 어린 나를 목침 위에 올려 세우고 싸리 회초리로 가느다란 종아리를 때리셨다. 어머님의 눈에 눈물이 흐르는 것을 본 나는 심상치 않는 일로 직감하고 맹목적으로 이 글을 배워 두어야만 했다.

  학교 가면 ‘대이고꾸신민노세이시(제국신민서약)’을 외어야 하고 집에 오면 쥐들도 모르게 숨소리를 죽여가며 이 글자를 외어야 하는 철부지 꼬마는 무엇 때문에 이런 곤혹을 당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소리 없이 울었다.

  어머님에게 매를 맞아서 분한 것이 아니라 이 약하고 쓸모 없는 땅에 태어나서 사는 것이 억울했다. 세계지도를 펴놓고 보면 넓고 넓은 땅이 많이 있건만 하필 이 좁고 어두운 땅에 태어나 영문도 모르고 종아리를 맞아야 했던 내가 가엽고 불쌍해서였다.

오만하다 후지산(富士山)


  하꼬네(箱根)에서 후지산을 바라보면서 사진을 찍었다. 후지산의 생긴 모양을 바라보니 무척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다.

  왜인들은 저 산을 천하의 영산이라고 말한다.

  산의 모양이야 나무랄 데가 없지만 왜인들이 저 산을 바라보면서 오만해지고 잔인해지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이 산은 모양이 아름다운 반면에 뿌리가 없다. 모든 산들은 산맥을 따라서 그 높낮이가 있고 그 가운데 높은 명산을 주산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산은 산맥을 따라 생겨난 산이 아니라 화산이 폭발하면서 봉우리가 되고, 그 봉우리 위에서 또 화산이 폭발해 화산이 폭발할 때마다 함께 올라온 용암 덩어리와 화산재가 쌓이고 쌓여서 산 모양을 이뤘다.

  따라서 산은 산이로되 산답게 태어난 것이 아니라 잿덩어리가 쌓이고 쌓여서 산의 모양을 갖춘 것에 불과한 것인데 사람의 눈으로 보면 아름답게 보일 때도 있는 것이다. 마치 화장을 한 여인네의 청초롬한 차림처럼 멀리서 바라보면 무척 아름다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산에 올라가 보면 모양에 비해서 볼품이 적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휴화산이어서 언젠가 산꼭지에서 영원히 아물지 않는 상처에서 싯누런 고름 덩어리가 꾸물꾸물 흘러나올 듯이 유황 냄새를 풍기고 용암이 꾸역꾸역 흘러나올 것처럼 불쾌감이 솟는다.

  사람들은 멀리서 이 산을 보면서 아름답다고 하지만 가까이 가보면 아름답다고 느껴지기 이전에 으스스한 느낌을 먼저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산에 올라서서 호연지기를 기른다든지 깊은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천하를 안아 보는 느낌은 결코 맛볼 수 없다. 그게 무슨 산이라 할 수 있겠는가?

  마치 마귀의 소굴처럼 느껴지기만 한다. 냄새가 나는 산, 가까이서 보면 구역질이 나는 산, 언젠가는 고름이 꾸물꾸물 새어 나올 것만 같은 상처 입은 산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1미터 미인, 10미터 미인이라는 속언이 있는데 이 산은 1000미터보다 먼 장거리 미인에 불과한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무조건 굉장한 미인인 것처럼 떠드는 것은 꽤 잘못된 판단인 성싶다.

  저 산이 하필 왜인들에게 주어져서 그들을 올바르게 가르치기는 고사하고 오만하게 만들고 그 오만과 방자함이 지나쳐서 이웃에 있는 우리나라를 깔보고 넘보게 하는 것이 얄밉게 느껴진다. 산이 별 볼 일 없이 오만하니까 덩달아 그들도 오만하게 우쭐거리는 것같이 느껴진다.

  왜인들 또한 겉으로는 잘 하고 친절한 것같이 보일는지 모르지만 알고 보면 속은 이 산처럼 속빈 콩깍지와 같은 것임을 알고 약간의 친절에 너무 현혹되지 말고 신중하게 처신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잘못하다가는 처녀로 둔갑한 여우에게 사탕 몇 개 얻어먹으려 하다가 혼마저 빼앗긴 어느 산골 총각처럼 되는 일이 없도록 항상 경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본다.


최면 걸린 질서


  왜인들은 어디서든지 한 줄로 늘어서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다. 도서관에서도, 버스 정류장에서도 줄을 선다. 줄은 한없이 길어서 그 끝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이지만 이들은 그 끝을 용케 찾아서 그 뒤를 메우고 있다.

  반드시 한 줄로 서 있는데 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리고 복잡한 장소라 하더라도 개의치 않고 그 줄에만 매달려서 엉금엉금 앞사람 엉덩이만 줄곧 따라 붙는다.

  줄서는 장소가 협소하면 그 공간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려는 목적으로 지그재그로 말뚝에 줄을 매어 두고 있는데 이들은 그 표시를 따라서 차곡차곡 줄을 서 있는 것이 마치 길들여진 양떼 같다.

  나는 이들과 함께 줄을 서면서 앞에 서 있는 젊은이에게 물어 보았다.

  “당신들은 이렇게 한 줄로만 줄을 서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매우 신기합니다.”

  “우리도 이제 문화국민인 셈이지요. 독일이나 미국에 가면 줄을 열심히 선다는데 우리도 선진국 국민이라는 긍지를 가지고 열심히 줄을 서는 것입니다. 이제는 습관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는 자랑스럽게 떠벌리며 어깨에 힘을 주었다.

  “나는 한국 사람인데 우리는 줄을 서도 이렇게 한 줄로 늘어서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석 줄 정도로 서 있소.”

  “아니! 석 줄이라니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아마 당신네들은 이해할 수 없을 터이지요. 우리는 오히려 한 줄로만 서 있는 것을 이상하게 보는 편이니까요. 마치 털깎이 하려고 줄 서 있는 양떼와 흡사하군요.”

  그 자는 흥미로운지 내가 한 모욕적인 말투도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듣기만 한다.

  “그 석 줄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말하면 처음 줄은 물론 먼저 온 사람들 차지이고, 두 번째 줄은 이 세상에 먼저 와서 할 일을 많이 한 노인들이 차지하며, 그리고 나머지 한 줄은 앞으로 이 세상을 이끌어갈 나이 어린 사람들과 몸이 불편한 사람들 차지입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 줄은 어김없이 나란히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것이오. 예를 들어 버스를 먼저 탄 경우라도 나중에 올라온 노인이나 어린아이에게 좌석을 양보한다오. 이것은 앞서 말한 세 가지 줄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고, 이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동양민족의 경우라면 기본에 속하는 도덕입니다.”

  “한국에 다녀온 사람들은 저마다 질서가 엉망이라고 하던데요.”

  “당연하지요. 한 줄로만 서는 습관에 젖은 사람의 안목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요. 이는 나무에 올라 앉은 원숭이가 나무 아래 책읽는 사람을 보고 나무 위에 앉아 있음을 뽐내는 것과 흡사합니다.”

  나는 그들의 질서정연한 줄서기에 심통이 나서 생각나는 대로 지껄인 말에 불과하다.

  지금 그들은 줄서는 습관에 젖은 양떼처럼 보일지 모르나 일단 유사시에는 맹목적으로 뭉칠 수 있으며 일사불란하게 행동하는 이리떼로 변할 민첩성이 숨어 있는 것 같다.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줄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석 줄 같기도 하다가 넉 줄 또는 다섯 줄로 보이기도 한다. 힘이 센 사람의 줄이 또 한 줄 있어서 넉 줄이 되고 엄청나게 바쁜 사람이 있어서 또 한 줄이 늘어나는 모양인데 이 때문에 줄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줄이 너무 많으니까 오히려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어서 너무 많은 것도 탈은 탈인 것이다. 이래서 줄서는 사람은 꼴찌가 되고 법을 지키는 사람은 바보가 되는 모양이다.


 흰 쌀밥에 날고기


  1910년에 이 나라 강토를 합병한 다음 그들은 쌀을 가장 먼저 빼앗아 갔다.

  토지측량을 한답시고 동양척식회사를 차려 농민들의 땅을 강제로 앗아갔으며 그 땅에서 난 쌀은 말할 것도 없고 농민들이 지어 놓은 벼농사도 ‘공출’이라는 명목을 붙여 몽땅 가져갔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만주에서 먹다 버린 콩껍질을 가져다가 먹이고 그것도 모자라서 풀뿌리와 나무 껍질을 뜯어먹게 만들었다. 이래서 우리들은 누렇게 부황증이 나기도 하고 견디지 못해 만주나 시베리아로 정처 없는 유랑의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빼앗아간 쌀을 그들 아이들에게 배불리 먹여 점차 성격이 포악해지게 만들어서 16년이 지난 후에 그들에게 총칼을 들려서 소위 대동아공영권을 이루려는 야심으로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또 노일전쟁을 도발해서 동서남북으로 미쳐 날뛰기 시작했던 것이다.

  마침내 진주만 습격을 비롯해서 태평양전쟁을 유발하고 이로 인해 한 때는 원자탄을 맞는 등 천벌을 받아 자멸 직전에 이르는 비운에 떨기도 했었다.

  영양학 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쌀에는 쌀눈(芽)이 있는데 여기에는 ‘지아민’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지아민은 신경계통을 튼튼하게 하는 역할을 하는데 이것을 먹지 않으면 도덕성이 희박해지고 신경이 날카로워진다는 것이다. 흰쌀은 쌀눈을 모두 뽑아 버렸기 때문에 맛은 좋으나 필수영양소가 부족하게 되어 있다. 그들의 우두머리들은 이러한 못된 짓을 저희 국민들에게도 서슴없이 자행해서 욕심을 채우려고 했던 것인데 지금 형편이 좀 나아지니까 쌀밥을 먹이기 시작하고 있다. 이들의 양곡정책 역시 앞으로 수년 후의 전쟁준비를 동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왜인들이 즐겨 먹는 음식을 보면 생고기를 많이 먹는다.

  ‘사시미’라는 생고기 음식은 육고기나 물고기를 생으로 먹는 것인데 쌀밥과 더불어 그들이 가장 애호하는 식사이다. 또 한가지 의심스러운 점은 쇠고기 값이 의외로 헐하다는 것이다.

  한국인이 경영하는 식당에 가서 냉면을 시켰는데 불고기가 한 쟁반 곁들여 나오기에 의아해서 물어 보았다.

  “불고기는 시키지 않았는데 왜 주시는 거죠?”

  “걱정 마세요. 냉면을 많이 드시게 하기 위해서 그냥 드리는 것입니다.”

  “고기가 많아 두 사람 몫은 되겠네. 냉면보다 불고기 값이 더 비쌀 텐데?”

  “아닙니다. 쇠고기 값이 헐하고 냉면이 더 비싸답니다.”

  이러한 것을 무심코 넘기면 아무렇지도 않겠지만 나같은 사람이 볼 때에는 매우 기분 나쁜 현실임을 느낄 수 있다. 생고기를 많이 먹는 짐승들 특히 고양이나 이리는 성정이 포악하고, 채식을 많이 먹는 토끼나 소는 성질이 퍽 양순한 편이다. 이 나라는 국민들이 모르는 사이에 이러한 음모를 다시금 획책하면서 언젠가는 못된 짓을 다시 한 번 더 저질러 보려고 축산정책도 고의적으로 동조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너무 여러 번 이들에게 당해 본 우리로서는 자그마한 일일지라도 그냥 넘겨 버리기에는 신경이 과민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쌀밥만 먹여 키운 자식 효자 없고, 보리밥 먹여 키운 자식은 효자가 된다’라는 속담이 생각난다.

  어느 날 저녁, 텔레비전을 보니까 ‘요오까가이(僚歌會)를 개최하고 있었는데, 70살이 넘은 노인네들이 마이크를 잡고 미친 듯이 떠들어댔다. 옛날 중학교 시절에 부르던 교가를 부르는 모임인데 텔레비전에서 대대적으로 방송까지 하고 있었다. 노래의 내용 중에는 ‘피를 흘리면서’ 또는 ‘목숨을 다 바쳐서’ 등 잔인한 냄새가 풍기고 있어서 태평양전쟁 당시 ‘가미가제’ ‘독고다이’라는 명분으로 젊은 학생들을 미치게 만들어서 앞장세울 때가 연상되어 섬찍한 느낌을 받았다.

  저 늙은이들이 아직도 옛날의 미련을 버리지 못해 젊은이들을 충동질하고 텔레비전도 덩달아 분위기를 잡아주고 있는 것을 볼 때, 그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정부도 양곡정책, 축산정책과 아울러 홍보정책까지 전쟁도발을 위한 동조행위를 알 듯 모를 듯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노략질하던 단맛을 잊지 못하고 군침을 다시며 혓바닥을 널름거리는 야수의 모습이 떠오른다.

  피는 물보다 진한가?


  ‘천황이 신처럼 더 뽐내지 못하는 까닭은 그도 인간처럼 칙간에서 대변을 보기 때문’이라고 뱉은 심술궂은 왜놈 글쟁이가 있었는데 그가 ‘아꾸다가와(芥川)’다.

  동양에는 부끄러운 일 세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동양문화의 발상지이고 중심이라는 ‘차이나’는 동양에서 가장 경제 후진국이 되어 있다.

  두 번째, 단일민족이라고 하면서 두 개로 갈라선지 어언 반세기가 넘은 ‘코리아’는 이제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은 분단국이며 동족끼리 서로 죽이고 할퀴며 산다.

  마지막 세 번째로 동양에서 민주주의를 가정 먼저 시작하였다고 뽐내는 ‘저팬’은 평범한 인간을 신이라고 떠받들면서 허망한 군주정치에 젖어 있다.

  이것들은 자랑이라고 하지만 어찌 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는 사실인 것이다. 이러한 부끄러움을 느껴서인지 일부 극좌파는, ‘천황제도는 과거의 유물이며 천황의 집안은 모두 반도에서 건너온 종족이므로 그를 추종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주로 젊은층에 많으며 과격한 행동을 통하여 항의하고 있어서 천황이 살고 있는 궁성 주변에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하여 경찰방호대가 항상 대기하고 있다. 그 입구인 ‘니쥬바시’ 앞에 가면 닭장차가 나무 그늘 아래 숨어 있는 것을 늘 볼 수 있다.

  이 ‘니쥬바시’라는 다리는 곧 이중교(二重橋)로서 두 개의 다리가 나란히 붙어 있는 형용을 그대로 말한 것이다. 70여년전 이봉창 의사가 왜놈의 왕을 죽이려고 폭탄을 들고 혼자 이 다리를 서성이던 자취를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우리 조선 사람의 마음에 영원한 그림처럼 떠올라 온다. 이중교는 여러모로 왕의 안전을 위한 발상에서 만들어진 것인데, 경찰의 경비만 믿고 신변보장을 받을 수 없다고 믿는 천황의 측근은 새로운 방호막을 구축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여러 가지 기발한 방법과 대책을 강구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 가운데 ‘야꾸자’라는 실력조직을 이용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야꾸자’라고 하는 일본의 낭인(浪人) 조직은 우리나라의 깡패 조직과 흡사하다고 하지만 보다 튼튼한 배경과 전통과 조직을 갖추고 있다. 이들은 단순한 약탈과 이권에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상당한 목적과 사업을 수행하는 단체로 인정받으면서 일본사회에 확고한 위치를 점유한 전국적 조직이며 점차 국제적인 조직확대를 꾀하고 있다.

  이들의 역할은 밝은 사회의 규율을 준수하면서 어두운 사회의 규율을 통치하는 것이며, 경찰의 능력으로 통제하지 못하는 영역에 대해서는 그들이 그러한 사회의 정보를 통괄하며 관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경찰은 이들을 비호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어서 이들은 이와 입술처럼 서로 돕고 사는 사이라는 것이다.

  천황제도를 비판하는 세력이 대개 극좌단체라고 보면 이들 ‘야꾸자’ 조직은 천황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비호하는 극우조직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신기한 것은 그 조직의 핵심이 한국계이며 세력을 주도해 나가는 것이 한국사람인 것이다.

  ‘과연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고 하는 속담이 여기에도 어울리는지 두고 볼 일이다.


  아가사까(赤坂)에 지는 꽃

 

  왜인과 한국인을 구분할 수 있는 방법 중에 한 가지는 노래를 시켜보면 안다.

  왜인들은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하는 것이 특징이다. 일본땅에서 노래깨나 하는 사람은 거의 한국사람들이며 일본에서 꽤 잘 알려진 가수들, 특히 인기 있는 톱가수들은 거의 한국계라는 점이다.

  만엽집(萬葉集)이라는 고대 가요집은 그들이 보물처럼 아끼는 문화유산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물론이고 가사와 비음이 모두 옛날 우리나라의 고어(古語)로 되어 있어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뜻을 이해하면서 읽을 수 있지만 그들은 뜻은 물론 내용도 모르고 중얼중얼 외워대는 꼴이 가관이다. 그들은 우리로부터 글을 배웠고 말을 배웠지만 그들 특유의 발음법 때문에 그대로 흉내낼 수 없어서 변질된 것에 불과하다. 그들은 단지 원숭이처럼 흉내내어 울부짖을 수 있어도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구성진 노래는 어림없다.

  아까사까(赤坂)는 일본 동경 궁성 서편에 인접해 있는 유흥가이다. 여기에 가면 우리나라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그러나 낮보다는 밤이 으슥한 후에 가면 서울에 즐비한 술집 골목 풍경과 흡사하다. 이 술집 아가씨들은 모두 한국에서 미인축에 들만한 인물로서 20대에서 30대 중반, 한창 나이에 요염한 모습을 지으며 애교를 떨고 있다. 이국 땅에 외롭게 피어 있는 국화꽃처럼 보이기도 하고, 사연이 복잡한 듯 어설픈 웃음을 짓는 할미꽃 같은 아가씨도 있다. 모두 이국 땅에 와서 독한 술에 찌들어 눈가에 주름이 지고 진한 화장을 했어도 콧등에 은은히 비치는 기미꽃은 그들의 고민스러움을 살며시 풍겨준다.

  일본당국이 우리나라 교포들에게 참혹한 차별대우를 하고 있다지만 이 사람들도 예외없이 가혹한 대접을 받고 있다. 우선 출입국 과정에서 차별대우를 받는다. 15일 이상 체류허가를 주지 않으므로 영주권을 얻을 심산으로 위장결혼을 하게 되는데 늙은 왜인잡배들은 아가씨들의 피묻은 돈을 뺏으려고 공갈 협박을 하기도 한다. 어찌하다가 돈을 좀 벌었다고 하는 아가씨도 있다고 하지만 대개는 이러한 소문에 현혹되어 우왕좌왕 하다가 몸 상하고 번 돈 탕진하고 쓸쓸히 사라지는 한국의 꽃이 수없이 많다. 이웃에 돈 많은 홀아비가 옆집의 가난한 유부녀를 돈으로 꾀어내어 한 가정을 파탄시키는 부도덕한 모양과 흡사하다.

  ‘이렇게 일본땅에서 사라지는 한국의 꽃들이 분수대로 한국 땅에서 살게 했더라면 좋은 과일을 맺는 사과나무가 되었을 수도 있으련만 못된 이웃을 잘못 만나 한낱 쓰레기 더미에서 뒹굴고 있을 따름이구나.’

  나는 혼자 자조하면서 그들이 다투어 따라주는 술잔을 사양하지 못했다.

  왜인들은 우선 한국의 선량한 어머니감들을 이런 모양으로 파괴하면서 전쟁을 걸어오고 있는데 우리는 부도덕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들을 모른 체하고 팽개쳐 두고 있다. 그들이 피나게 벌어들인 외화로 해외여행을 한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식민지로 가는 길


  일본제 전자밥통이 아니면 밥을 지어먹을 수가 없다고 하는 한국의 주부가 많다.

  밥통 몇 개를 싸들고 공항에 줄 서 있는 사람은 한국의 주부가 영락없다. 그들은 값이 헐하고 품질이 좋은 일제밥통, 가전제품을 무척 선호한다. 그들은 왜인들이 세종대왕(돈)을 강도질하려는 검고 약삭빠른 심사를 눈치채지 못한다.

  일본계 회사에 입사하면 우선 월급이 많으니까 죽자살자 열심히 일을 하는데 어떤 이는 일본상사 주재원들에게 귀중한 정보를 물어다 주는 자도 있다. 심지어는 앞장서서 무덤을 파헤쳐 보물을 앗아가는 마구 노릇을 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일이 끝나면 쫓겨나서 실업자가 되고 그때부터 후회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이다. 귀중한 정보를 헐값에 팔아버리는 매국노 이완용이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일본에서 방영하는 화면을 수신할 수 있는 안테나를 설치하면 꽤 품위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지 부산이나 경남북지역은 물론이고 서울에도 이것을 자랑스럽게 달아두는 집이 늘어나고 있다. 이제 우리 아이들은 씨는 한국의 씨지만 말과 행동은 왜인을 닮아가고 있다.

  그 어린것들이 무엇을 알겠는가. 못난 부모들이 좋아하니까 덩달아 좋아하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이제 귀여운 아이들까지 빼앗겨 식민지 백성으로 만들 것이다.

  기술개발은 하지 못하면서 왜인들에게 기술을 구걸하는 기업이 늘어나고 있다. 심지어는 ‘일본은 우리에게 기술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고 푸념하는 사람도 있다. 왜인들은 ‘한국의 기업은 기술개발은 하지 않고 우리가 애써 개발한 것을 달라고 조른다’라고 하며, ‘한국은 우리를 경제형님처럼 예우하고 있다’고 코웃음치는 것을 들었다.

  그들이 갖고 있는 기술이라는 것은 별 것 아니다. 그것은 선진공업국에서 힘겹게 발명한 원리를 여러모로 손질해서 깔끔하고 쓰임새 있게 만들어 놓은 것에 불과한 모방품이다. 일본은 일찍이 가족주의 경영을 통해 노사관계를 운영해 왔고 종업원들이 자기 일처럼 성심성의껏 손질하고 다듬어 개발한 기술인데, 우리나라처럼 마구잡이로 사람을 쓰는 노무관리 형태에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것이다. 순순히 내어놓기는커녕 방해놓지 않을까 걱정된다.


 지옥을 낙원으로


  세계에서 사람이 살기 편한 도시로 일본 동경을 손꼽는 사람이 많다. 우선 사람이 살기 좋은 기후에다, 공기가 맑고, 교통이 편리하며, 사람들이 모두 친절하고, 갖고 싶은 물건은 없는 것이 없다. 다만 물가가 비싸다고 하는 것이 흠이지만 그 정도는 게으른 사람들의 넋두리에 불과하고 돈이 없는 사람이라 해도 자기 나름대로 노력만 하면 먹고사는 것에는 지장이 없다고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파리, 런던, 뉴욕과 같은 도시를 두고 사람이 살기 좋다고 했던 때가 있었지만 그것은 옛말이고 지금은 일본이 경제대국으로 부상하면서 그들이 살고 있는 땅을 낙원으로 만들려는 노력과 더불어 소문이 난 것이다. 그들은 과거의 선진국 도시들이 갖고 있었던 장점은 키우고 단점은 없애버려 살기 편하도록 만들어 나가고 시민들도 정성껏 협조하고 있는 까닭이다.

  왜인들은 개, 고양이 등 애완동물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개를 끌고 골목길을 산책하는 늙은 부부를 만났다. 남편의 손에는 자그마한 손삽이 들려 있고 부인은 쓰레기봉투를 들고 있다. 만일 개가 똥을 누면 모아다가 종이에 싸서 쓰레기통에 버리기 위해서라고 한다니 무심히 보아 넘길 일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이와 같은 왜인들의 노력은 동경뿐만 아니라 전 국토를 낙원으로 만드는데 투자하고 있다. 또한 일본의 땅값은 세계적으로 비싼 것이 특징이다. 그들의 땅은 세계에서도 가장 척박하고 쓸모 없는 잿덩이임에도 불구하고 땅값이 비싼 까닭은 땅에 막대한 투자를 해서 살기 좋은 환경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이웃에 있는 우리나라도 덩달아 땅값이 오르고 있는데 그들처럼 막대한 투자를 해서 비싼 땅을 만든 것이 아니고 공연히 투기를 하기 위해서 값을 올려놓고만 있는 점이 다르다.

  특히 왜인들은 땅을 탐내는 족속인데 처음에는 무력을 통해서 땅을 차지하려 했다가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까 이제는 돈으로 땅을 사들이고 있다. 미국에도, 브라질에도, 아르헨티나에도, 하와이에도 그들의 땅욕심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 실정인데 장차 우리나라 땅도 그냥 지나치리란 보장은 없다. 지금도 암암리에 모의를 하고 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한 판단일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 중에 땅값을 후히 주면 누구에게나 팔아 버리려는 몰염치한 투기꾼이 없으리란 보장도 없기 때문에 앞으로 이 나라의 땅이 왜인들의 소유로 변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러한 의미에서 침략의 형식이 다르다 하더라도 정복은 정복이며 빼앗기는 것은 엄연히 빼앗기는 것이 틀림없다.

  왜인들에게 본받을 것이 있다면 땅을 사랑하는 것이다. 워낙 척박하고 살기 어려운 환경에서 살다보니 땅의 아쉬움을 잘 알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땅을 사랑하기 때문에 탐내며 땅을 잘 가꾸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보다 비교할 수 없이 좋은 금수강산을 물려받고도 이를 아끼고 사랑할 줄 모르며 이를 밑천으로 돈벌이나 해보려는 심사만 그득하니 그나마 이를 제대로 지켜낼지 의문이다.


  경제도 지나치면 낭비


  일본처럼 되려면 적어도 20년은 걸린다고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일본을 따라가기에 앞서 일본은 더 빨리 달려가는 것을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물론 거북이처럼 기어서라도 토끼를 따라 잡은 동화 속의 이야기도 있지만 그러한 동화는 게으른 아이를 가르치는데 쓰일 말이지 일단 같은 방법에 의할 경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경제경쟁은 육상경기와 흡사해서 일단 앞질러 간 자는 그 선두자리를 쉽게 내어놓지 않으려고 한다. 선두를 달리던 자들이 기적적으로 쓰러지게 되면 다음으로 달리는 주자가 선두를 차지할 기회가 생기게 되지만 그러한 기적을 현실적으로 기대하기가 어렵다.

  일본을 경제로서는 따라잡을 수 없다고 하는 말은 의욕을 감퇴시키고자 한 말이 아니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방법을 달리하라는 격려로 이해해주기 바란다.

  우리는 일본을 능히 앞설 수 있는 입장에 있음을 강조하고자 한다. 따라잡기 어려운 것을 억지로 따라 잡을려고 애쓰는 것보다는 앞설 수 있는 방법을 써서 앞서면 되는 것이다.

  뭣 때문에 그들의 꽁무니를 따라 잡을려고 하는지 심보를 이해할 수 없지만 그것은 과거 식민지 시절에 남아 있던 찌꺼기가 가시지 않고 있는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이모씨, 정모씨처럼 재벌이 되기 위해 정미소를 짓거나, 쌀장수를 시작한다 해서 그들을 따라 잡을만한 재벌이 될 수 없는 것처럼 구태여 재벌이 되려고 눈에 불을 밝히고 헤맨다는 것은 비극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들 모두가 똑같은 재벌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국이나 일본을 능가하는 경제대국이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수월하게 얻어지는 것은 더욱 아니다. 경제대국이 되기 위해 온 국력을 기울이는 것은 정신적은 물론 경제적으로 보더라도 엄청난 낭비라고 생각된다.


  경제보다 우월한 무기


  우리가 경제개발에 눈을 뜨고 재미를 보아 온 지도 어언 30여년이 지나가고 있고 앞으로도 경제개발에 대한 미련을 좀처럼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앞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중적인 경제개발을 해오는 동안에 우리가 얻은 것도 많지만 잃은 것도 또한 많다.

  우리가 얻은 것이 굶지 않고 잘사는 것이라면 잃은 것은 자기를 모두 잊어버린 것이라고 하여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우리가 남북통일을 하려고 여념이 없는 틈을 타 왜인들은 앞다투어 갖은 꾀를 다해서 남북통일을 훼방놓으려 한다. 이것은 근래 그들이 획책하는 갖가지 행동에서 나타나고 있는 사실을 유추하면 삼척동자라도 짐작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이 역사적으로도 그렇지만 지금도 우리에게 하는 행동을 보면 그 정도의 의심은 누구나 가질만한 것이다.

  수십년간 고질적인 수입초과 현상을 고의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려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유독 한국교민에게 대하는 차별대우는 날이 갈수록 각박해지고 있다.

  왜인들은 공원이나 정류장에서 약간의 실수만 하여도 ‘조센징 조센징’을 뇌까리면서 경멸하는 말투를 서슴지 않는다. 그들은 별 것도 아니면서 유독 한국에 대해서 콤플렉스가 쌓인 탓인지 비하시키려 애를 쓰고, 서양사람들이라면 사족을 못쓰고 굽실굽실 오금을 펴지 못한다. 흔히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쫄자기질’이라고 하는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우리는 그들보다 못할 것도 없으면서 기죽어 살 이유도 없다.

  생각건대 다음 세 가지 약속만 할 수 있다면, 그리고 이것을 반드시 실천할 수 있다면 그들의 침략을 막아내는 것은 별 어려운 일이 아니고 오히려 이 기회에 그들을 능가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첫째,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돈을 잘 쓰는 것도 중요하다. 분수에 알맞게 돈 쓰는 법도를 익혀 왜인들처럼 경제동물이라는 욕은 먹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일부 사람들 가운데는 갑자기 돈을 좀 가지게 되었다고 씀씀이가 헤퍼져서 욕을 먹는 사람이 없지 않다. 이러한 사람을 본뜬다든지 선망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으면 차츰 우리나라 사람들도 분수를 알고 품위를 지킬 줄 아는 문화국민이라는 칭송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만든 상품도 신용하게 되고 우리가 혹 외국에 드나든다 해도 존경받는 민족으로 대접받을 것이다.

  우리도 옛날부터 도덕적으로 훌륭한 조상을 두었고 존경받아 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미 우리들 각자의 정신에 잠재하고 있는 능력을 다시금 발휘하고 실천하는데 있어서 별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보이는 만큼 묵묵히 실천해 봄직한 것이다.


역경을 만나면


  둘째, 한국인끼리는 뭉쳐야만 살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실천하자.

  민족을 통일하는 것도 똘똘 뭉치는 방법의 하나이고, 외국에 나가 있거나 국내에 있거나 서로 다투지 아니하고 더불어 살 줄 아는 것도 방법의 하나이다. 나아가 각자의 힘을 모아 더 큰 힘을 배양하는 것도 그 방법의 하나이다.

  우리가 역사적으로 외침을 당해 똘똘 뭉쳤을 때에는 한번도 수모를 겪은 일이 없었다는 것을 명심해 봄직하다. 왜인들은 한때 ‘일본주식회사’라는 이름을 붙여 전후부흥을 이룩하였고 국내외에 있는 종족끼리의 대동단결을 통하여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그 여세로 경제대국으로 부상하는 힘을 키워왔던 것이다. ‘일본주식회사’라는 것은 정부는 물론이고 기업체, 노동자, 농어민, 가정주부, 학생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한 기업체의 주인이며, 사원이며, 주주이며, 고객으로서 국가를 한 기업체의 단위로 압축시켜 본 명칭이다.

  셋째, 역경에 강한 민족임을 알고 자신을 가지자.

  우리 국민에게는 한글과 더불어 역사를 반드시 가르쳐야 한다. 역사를 모르면 그 민족은 반드시 망하는 것임을 알게 해야 한다. 왜인들로부터 받은 침략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큼직한 것으로는 임진왜란, 한일합병이며 이제 세 번째의 침략을 받고 있다.

  제2차 왜란까지는 운이 좋아서 다시 회복할 수 있었으나 이제는 세 번째 당하는 것이라 그들도 역시 이번에는 실수없이 놓치지 않으려 할 것이 틀림없다. 즉 우리는 이제 한번만 당하고 나면 다시는 회복하기 어려운 곤경을 맞을 것이며 다시는 햇볕을 볼 날이 없을 것이다.


  평평성성(平平成成)

  ‘아끼히도’가 ‘히로히토’의 뒤를 이어 연호도 평성(平成)으로 고쳐서 부르기로 하였다.

  ‘평성’이라는 글자는 한자에서 나온 것인 만큼 그 뜻이 가지는 야심을 살펴보면 그들의 허황한 속셈도 깊이 들여다보인다.

  한문자의 뜻은 대개 중국 고전에서 깊이를 풀이하는 것인데, 시경(詩經)과 사기(史記)에는 내평외성(內平外成), 지평천성(地平天成)이라는 문구가 있고, 서경(書經)에는 왕도평평(王道平平), 패도성성(覇道成成)이라는 뜻이 있다.

  여기서 왕(王)은 다스리는 자를 말하고, 패(覇)는 정복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흔히 ‘평안할 평’과 ‘이룰 성’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평범한 글자가 두 개로 합쳐지면서 새로운 다른 뜻을 의미하게 되는데 ‘평성’이라는 글자는 평범한 듯하면서도 너무나 엉큼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임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평할 平’자는 ‘화목’의 의미와 ‘다스림’의 의미이고, ‘이룰 成’자는 가진다는 뜻과 병합한다는 뜻도 있어서 ‘平成’이라고 하면 안으로는 자기네 무리를 결속해서 뭉치게 하고 밖으로는 즉 아세아는 물론 세계도 지배하겠다는 의미이다. 종래의 못다한 야심을 이 기회에 실현하려는 뜻이다.

  그들의 과거행적이 진실로 평화를 사랑했던 민족이었다면 굳이 이러한 말을 나쁜 뜻으로 해석할 이유가 없지만 그들이 한반도를 비롯하여 동양을 뒤흔들고 세계를 시끄럽게 한 과거의 행패가 너무나 엄청나고 못된 짓거리만 하였기 때문에 아무리 듣기 좋게 해석해서 잘 봐 줄려고 해도 잘 봐 줄 수 없는 선입감은 어찌 할 수 없다.

  여하간 이 기회에 우리는 정신을 가다듬어 두번다시 곤혹스럽던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되 이 기회에 그들을 능가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서 못 다한 설욕을 해봄직한 것이다.

  우리 민족은 역경을 만나면 더 강해지는 특성이 있다고 하니 현재의 난국을 지혜롭게 헤쳐나가 수백년 멍울져 있는 조상들의 원한도 이 기회에 설욕해야 한다.



일본을 따라잡자


  한번 해보자


  이번 축구게임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일본에 대한 우리 민족의 적대감과 피해의식은 그 역사적 의미에서 뿐만 아니라 현재 세계 제일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일본에 대한 경계심리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의문을 제시해 본다.

  2차대전의 폐허 위에서 신화라고 불릴 만큼의 경제 성장은 일본의 위상을 과거의 패전국의 위치가 아닌 당당한 국제사회의 주역으로 등장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아직까지 일본에 남아 있는 군국주의의 찌꺼기들과 현재 그들이 추구하고 있는 군사 대국화와 정치 대국화는 그 초기 단계부터 아시아 각국들의 우려를 낳고 있다. 일본과 가장 근접한 지정학적 위치에 있으며 과거 그들로부터의 잔혹한 수탈의 상처를 안고 있는 우리에게는 일말의 공포감마저 느끼게 한다.

  그러나 우리 생활 주변에 깊숙이 침투해 있는 일본문화와 절대적으로 일본에 의존해 있는 우리의 산업구조에서 이런 징조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임에 틀림없다. 현재 일본은 너무나 높은 벽이며 그 높이는 계속 올라가고 있다.

  하지만 반드시 넘어야 할 벽이기에 한국인임을 자처하는 사람이라면 일본을 알아야 하며 일본을 이겨야 한다.

  그렇다면 ‘일본을 이기는 길’은 무엇일까? 기업경영의 측면에서 일본 기업이 가지고 있는 약점과 그 대처방안을 알아보고자 한다.

  

  약점을 살펴보자


  일본은 대표적인 가공무역국의 형태를 띤 나라이다. 부존자원의 부족 특히 에너지 자원의 절대 부족은 과거 일본의 아시아 침략의 결정적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현재 일본이 이룩하고 있는 수출에서의 흑자 상당분이 원유 수입에 쓰여지며 오일 쇼크의 충격 이후 일본 산업계는 에너지 절감운동으로 오늘날 그 성과를 거두고 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일본은 수출 지향 전략으로 경제를 운용했으며 그들의 최고 성공작인 자동차는 이미 전 세계의 도로를 달리고 있다. 자동차는 그 파급 효과와 부가가치가 대단히 큰 사업으로 혼다, 닛산, 도요타는 세계 굴지의 메이커로 성장하였다.

  그 이외의 소니, 마쓰시타, 샤프의 전자업체도 세계 시장에서 경쟁 우위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장들은 성숙기에 접어들고 있으며, 일본 자동차 산업의 규모 축소는 이미 시작되었다. 일본의 11개 자동차 회사 중 상당수가 도태될 조짐이다. 1992년 다이하쓰는 미국에서 철수했다. 닛산과 도요타의 해외 자동차 판매는 80년대 중반, 호나다는 80년대 후반이래 주춤하고 있다.

  그들의 첫 번째 성공작인 가전제품은 급속한 가격 하락과 생산 정체로 타격을 받고 휘청거리고 있으며 소니, 마쓰시타 등의 일부 대기업만이 선두를 유지하기 위한 연구 개발 분야에 충분히 투자할 여력이 있을 뿐이다.

  또한 미래의 성장 전략 분야로 지정한 정보 기술, 특히 컴퓨터 통신에 막대한 투자를 했으나 일본은 점점 가치가 하락하는 하드웨어의 생산자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대부분의 정보 기술 분야에서 이류국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이러한 상황들은 현재 일본이 맞고 있는 미국과 유럽의 보호무역주의와 아시아 각국의 경계심리에서 비롯된 시장에서의 저항 때문만은 아니다. 일본은 막강한 첨단기술과 엔고를 등에 업고 해외 서비스 시장에 무한정으로 진출하고 있다.

  그렇다면 일본의 약점은 무엇인가? 일본이 가지고 있는 취약점은 네 가지로 집약되는데 모두가 고객과 관련된 것이다.

  첫 번째 취약점은 일본 기업들은 수직적, 그리고 수평적으로 통합 정도가 심화되어 있기 때문에 변화하는 소비자의 요구에 재빠르게 부응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산업조직은 너무 비대하기 때문에 소비자가 원하는 것을 제때 제공하기가 힘들다.

  두 번째 취약점은 중앙 집권식으로 운영하고 관료적이기 때문에 해외 고객과 효과적으로 의사소통이 어렵다는 것이다. 거대한 관리 조직은 수일 내에 결정할 사항을 수 개월 내지 심지어는 수년간 숙고하곤 한다.

  세 번째 취약점은 의사 결정자들이 해외 고객들과 거의 직접적인 접촉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일본은 대부분의 시장들과 멀리 떨어져 있으며, 일본 회사들은 일본인이든 미국인이든지 현지 경영자들에게 실질적인 권한을 거의 위임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 취약점은 일본인들은 고객의 문제점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내기보다는 그들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예를 들어 기술을 판매하기를 선호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로 그들은 문제에 바로 직면하기보다는 중간업자들을 통해서 판매하기를 선호한다.

  따라잡을 방안은 있다


  일본 기업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물론 일본 상품에 뒤지지 않는 최적가의 고품질의 상품을 생산하고 판매해야 한다. 그러나 상품 품질면에서 일본을 앞서려고 진력한 나머지 회사가 도산할 위기에 처할 정도로 경영 상태가 악화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일본의 약점을 최대로 이용하여야 한다. 일본 기업이 전반적으로 서투른 대 고객 관리에 초점을 맞추도록 해야 한다. 고객 통합은 ‘고객 지향’ 또는 양질의 서비스 제공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고도의 고객 통합을 이룩한 회사들은 고객과 같이 호흡하며, 그들의 의견을 모든 활동에 포함시키고, 거의 모든 직원들은 대 고객활동에 투입하여 고객들의 변덕스러운 요구를 충족시키려고 노력해야 한다.

  즉 기업 경영에서 조직의 수직적 및 수평적 통합을 포기하고 중앙 집권을 분화하며 회사 전체를 판매조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그리고 고객의 요구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물론 이 작업에는 오랜 세월과 많은 시행착오를 겪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리엔지니어링 작업을 통한 기업의 체질 개선과 21세기의 기업 경영의 핵심적 요소인 고객 중심의 마케팅 전략이 일본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비결이다.

  여기서 널리 보도된 정치 및 금융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탄탄한 제조 문화와 일본 국내시장의 거의 완전한 지배로 지어진 난공불락의 요새라는 믿음이 과장되고 미화되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 수 있다.


  한번만 이기면 된다


  세계 시장에서 비교우위를 점하고 있지만 의외로 취약하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일본이 가지고 있는 취약점들은 그들이 추구하는 수출주도 정책이 그 대상인 해외의 고객들을 도외시 한 채 일본 그들 자신의 기준에 맞는 기업 경영에서 파생했으며, 이런 취약점들이 일본의 경제 성장의 밑거름이 된 요소들과 맞물려 있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치명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일본은 구미 선진국의 견제와 아시아 신흥 공업국들의 추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이며 이미 상당수의 기업들이 경영개선에 나서고 있다. 그 막강했던 정부도 ‘작은 정부’를 지향하기 위한 내부적 몸살을 앓고 있다.

  일본의 막대한 첨단 기술에의 투자와 그 동안 축적한 부를 토대로 한 영향력은 미래의 일본이 앞에서 지적한 기업경영의 약점만이 아닌 인구의 고령화, 사회구조의 수직화 등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경제대국의 위치를 쉽게 잃어버리지 않으리라는 것을 예측하게 한다.

  아시아의 용에서 미꾸라지로 전락한 우리 경제의 구조적인 위기론이 시정의 여론을 주도하고 있는 지금 우리의 성장은 단지 일본을 표적으로 하는 안일한 적개심과 분노 그리고 헤어날 수 없는 콤플렉스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일본이 가지고 있는 장점, 세계를 제패한 그들의 저력이 무엇인지 우리 한국과 한국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도 약점이 있다는 것과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이 우리에게도 있다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우리를 몇 차례씩이나 침략해 왔지만 끝내 이기지 못했다. 우리에게는 일본인들이 갖지 못한 장점을 많이 갖고 있다. 그 중의 하나는 우리의 「씨름」엔 다섯 판을 져도 ‘다시 보자’는 끈기가 있지만 일본의 「스모」엔 단 한 번만 져도 ‘졌다’라고 하면서 영원히 승복하는 그것이 있다는 것을 아는가?

  흔히 모든 분야에서 우리는 일본에 많으면 20년까지 떨어져 있다고 한다. 하지만 20년 후 그들의 전철을 밟지 않고 타산지석으로 꾸준히 나아간다면 일본의 젊은이들은 오늘의 나처럼 한국을 이기는 길을 찾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 미래지사이다.



일본은 문화가 있는가?


 가장된 실상


  어떤 사회든 인간은 그 속에서 형성된 문화를 바탕으로 환경에 적응하고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나름대로의 합리성과 발전 논리를 갖는다.

  이처럼 한 나라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유형의 문화 행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문화 행위 자체만을 개별적으로 연구하는 방법보다는 그 나라 문화가 나타내는 맥락 속에서 그것을 이해하려는 문화 상대론적인 관점이 필요하다.

  이때는 우리 문화에서 비롯된 선입견과 절대적이라 믿는 기준, 개념, 척도를 객관적으로 반성해 보는 자세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러한 인류학적 관점에서의 문화에 대한 시각을 언급한 것은 앞으로 서술하게 될 일본 문화에 대해 좀더 객관적 입장을 유지해야 할 필요를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얼마 전에 열을 올린 축구시합에서도 보았듯이 일본과의 대결이 있는 경기는 마치 전쟁이라도 하는 것처럼 해당 선수뿐 아니라 양국의 모든 국민들이 격분한 감정으로 경기에 임했고, 그 승부에 굉장한 의미를 부여했다.

  평소에 양국은 과거의 사실들에 대해 더 이상의 감정적 대립은 없는 것처럼, 아니 이제는 서로 협력해서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나갈 것처럼 행동했었지만 이번 게임에서 확인했듯이 아직도 우리 국민들의 가슴속에는 과거에 대해 처리되지 않은 감정적 앙금이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감정을 앞세운 상태에서 현대 일본의 문화를 관찰한다면 진정 우리가 올바르게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할 부분에 대해 냉정하고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을까?

  어쩌면 일본이 한때 우리나라를 지배했었다는 역사적 사실마저도 일본의 문화가 형성, 변형되어온 배경의 한 부분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 지금 견지해야 할 객관적 자세인지도 모르겠다.

  현재 일본 문화를 이해함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전제가 되어야 할 것은 일본 문화의 기원에 대한 이해일 것이다. 현재의 문화란 결국 과거 문화의 발전, 변화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일본 문화의 형성기원


  문화라는 창을 통해 오늘의 일본을 좀더 심층적으로 알아보고자 함에 있어 문화라는 개념 자체가 동물과 달리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개방적인 인간이 역사를 통해 형성해 온 총체를 의미하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히 일본인들이 자신의 정체를 역사적으로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가를 알아보아야 한다. 또한 존재의 집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언어가 어떻게 해서 성립되었는가도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일본인들의 출현에 대한 설명으로 황색의 피부, 검은 직모, 갈색 눈동자, 몽고반점 등의 형질적 특징은 일본인이 아시아로부터 신대륙에 걸쳐 널리 퍼져 있는 몽골 인종의 일파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그 얼굴 생김새, 형질에서 개인차가 커서 한 국민으로서 통일적인 특징을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구석기 시대 이래 인류의 이동은 유라시아 대륙의 내륙으로부터 해안으로 밀려 내려왔던 바, 이 영향은 일본에서도 당연하다. 지리적으로 볼 때 일본은 인류가 이동하는 선의 끝이었다. 더 이상 나갈 곳이 없는 일본 열도에 장시간에 걸쳐 여러 인종이 계속해서 상륙하고, 그들이 혼합을 거듭하면서 일본인이라고 하는 인종이 빚어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일본인들

  그러나 최근의 형질인류학에서는 종래 불변이라고 말하던 형질적 특징이 서서히 변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일본인은 반드시 그 신체적 특징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 듯한, 외부로부터의 대규모적인 인구이동으로 인해 형성된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의견도 가능해진다. 구석기 시대 이래 기본적인 인구 집단이 있었고 그것이 때때로 혼혈을 겪으면서 현대 일본인으로 진화해온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일본 문화 형성을 알아보면서 일본인, 아니 그것보다는 특별한 이유 없이도 우리 국민에게 감정적 흥분을 유발시키는 일본인이라는 존재의 형성 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참 묘한 재미가 있다.

  그리고 일본에는 다른 일본인들과는 좀 구별되는 신체적 특징을 가진 아이누라는 인종이 있는데 이 민족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위해 작성된 자료에는 일본에는 아이누를 비롯, 여러 민족이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런 까닭에 일본을 단일민족국가라고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라고 하여 일본이 단일민족국가가 아니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표명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소수 민족인 아이누들은 적지 않은 민족차별의 어려움을 겪으며 생활하고 있다. 아마 일본인에게 있어 아이누 문제는 미국의 인디언 문제와 여러 가지로 비슷한 것 같다.

  이러한 일본의 민족 구성을 단일민족국가인 우리나라와 비교해 볼 때 어떤 민족적 자긍심과 같은 것이 느껴진다. 물론 단일민족국가와 복수민족국가는 그 나름대로의 장단점이 있기 때문에 어느 국가가 더 우수하다는 식의 생각은 옳지 않다. 다만 국가 발전의 토대가 될 수 있는 민족적 화합을 이룩하는 데는 복수민족국가인 일본보다는 단일민족으로 구성된 우리가 더욱 유리한 기초를 가지고 있다는 것, 즉 우리가 일본을 경제적으로 앞지를 수 있다는 가능성이 더욱 크다는 것이다.

  이처럼 일본에는 소수민족 문제가 있기는 해도 일본을 대표하는 독특한 문화가 존재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그러한 문화 형성에 결정적인 구실을 한 것 중에 일본어를 빼놓을 수 없다.


  일본말


  일본어는 대략 일본 국내에서만 사용되고 있는 언어로서, 세계의 어족 중에 친족을 가지고 있지 않은 언어라고 말해지고 있다. 일본어는 바로 일본열도를 동서로 양분하는 듯한 악센트와 단어의 차이가 있고, 그 가운데서도 작은 사투리 권이 여러 개 있다.

  그 외에 계급, 직업 등의 차이도 근대 이전에는 컸다고 한다. 현재로서는 텔레비전, 라디오, 신문 등의 대중 매체의 발달에 의해 평균화가 계속되고 있으나 남녀의 말씨 차이는 비교적 강하게 남아 있다.

  이러한 일본어의 형성을 알아보기 위해 먼저 일본을 둘러싼 언어의 분포를 살펴보자. 일본어와 마찬가지로 대륙의 북부에 계통불명의 한국어 외에 퉁구스, 몽골 둥의 여러 알타이어가 있고, 그 남쪽에 중국어를 중심으로 한 시노티베트 어족이 있다. 나아가 남태평양에는 바라오-폴리네시아 어족이 있다.

  그러나 일본어는 주변 지역의 언어와 어느 정도 관계를 보이면서도 고립적이다. 최근에는 일본어를 단순한 기원론, 계보론에서가 아니라 언어접촉을 되풀이하면서 형성된 것이라고 하는 관점에서 일본어의 기원문제를 다루기도 한다.

  이러한 일본어와 한국어의 관계에 대해 한국 학자들의 논문이나 책을 보면 어휘상으로도 많은 일본어의 어원이 우리말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지명 등에서 그러한 유사점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를 사는 우리 같은 보통 사람으로는 일본어를 한국어와 좀더 연관시킬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외국어로서 학습하는 편이 유익하다는 생각이 든다. 문법 구조가 비슷하고 한자를 우리보다 많이 써서 분명히 의미 파악에서 다른 언어에 비해 수월한 점이 없지 않으나, 조금 시간이 지나고 보면 특히 어휘력에서 오히려 한자가 장애가 되는 수가 많다.

  언어란 우선 상대의 의사와 정감을 파악하는 데 필요하기도 하지만 일방적인 소통은 결국 불구에 가깝다. 정신만 바로 박혔다면 일본어를 비롯한 외국어를 옳게 익혀 우리에게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채워가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일본문화 환경


  지금까지 일본 문화의 기원이라 볼 수 있는 일본인의 출현과 문화 형성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친 일본어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는데, 현대 일본의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는데 있어 그 문화의 뿌리를 살펴보는 것은 너무나 기본적인 것으로 이러한 과정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이제부터는 일본 문화 형성에 있어 일본의 환경적인 요인이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사람이란 동물과 달라 주어진 자연 환경과 폐쇄적으로 연결된 존재가 아니다. 따라서 개방적 존재로서 그는 자연환경과 자신 사이에 문화라고 하는 또 하나의 환경을 구축하고 이를 후손에게 물려준다. 이러한 문화 유산은 또다시 단절과 보존이라는 두 극단 사이에 놓여 있는 여러 가지 대등방식에 의해 손질되게 마련이다.

  한 민족 내지 민족문화의 원형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문화는 비교적 변화하지 않는 자연에 비해 역사와 더불어 변화하게 마련이다. 때로는 그 변화가 아주 완만하여 하나의 문화유형이 거의 불변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고, 때로는 아주 급격하여 마치 단절되고 파괴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그러나 문화 전통이란 불변하는 듯한 속에서도 변화되고 단절된 듯한 속에서도 계승되게 마련이다.

  일본 문화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일본이 문화를 자연 환경과 관련시켜 설명하고자 할 때 많은 사람들이 지진이라는 현상을 주목한다. 아시아 대륙을 지탱하고 있는 아시아 플레이트 밑에 그것보다 비중이 무거운 태평양 플레이트가 끊임없이 흘러 들어오고 있는데, 양자는 일본 열도 바로 밑에서 마찰한다. 그래서 뒤틀림이 일어나고 그때 축적되는 에너지가 일정한도를 지나면 뒤틀림을 원래대로 되돌리려고 하는 힘으로 작용하면서 대지진이 발생하게 된다.

  아시아 대륙과 태평양 사이에 일본 열도가 자리잡고 있는 한, 지진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인 셈이다. 이런 지진이나 그와 관련된 자연현상들은 견디기 힘들 정도의 정서 불안을 자아내게 한다. 이러한 대지로부터 배반당한 일본은 정서 불안의 분출구로서 조선인과 중국인에게서 찾아 천재 아닌 인재로 인해 수많은 인명피해가 있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한다. 이와 같은 불안이 일본인과 일본 문화의 특징을 만들어내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남겨 놓은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지진 현상과 더불어 일본 문화에 많은 영향을 미친 환경적 요인으로는 습기를 들 수가 있다. 일본은 섬나라인 까닭에 습기가 일본 문화에 남겨 놓은 흔적들을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집을 지을 때 여름을 생각해서 통풍이 좋아야 한다는 것은 일본인의 오랜 관습이다.


  생활에서 본 습기문화

  이와 같은 이유로 일본에서는 온돌이 정착하지 못했다. 마루 밑을 막게 되면 습기가 그곳에 흡수되어 건물이 상하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메이지의 문명 개화 이후, 근대적인 구미계의 기술이나 제도가 적극적으로 도입되고 이른바 양풍의 건조물이 여러 곳에 세워졌어도 자세히 보면 고래의 민간건축의 기본적인 구조 양식을 답습되고 있다.

  습기가 많아서 생겨난 또 하나의 생활습관으로서 관공서나 점포 이외의 양관에서는 대체로 신을 벗는 습관을 들 수 있다. 진 땅을 딛고 다닌 신을 신은 채 실내에 들어설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일본에서도 다다미가 보급되기 이전에는 판마루 위에 신발을 벗고 올라가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는 자세가 일반적이었는데, 동남아의 높은 마루식 주거생활과 공통된다. 그러다가 다다미가 보급되면서 정좌가 보편화되었다. 현관이 중시되는 것도 신발을 벗는 습관과 연관되며, 따라서 습기 문화의 일종으로 간주된다.

  오늘날 일본에서의 습기 문화를 좀더 실감하자면 입욕 문화의 발달을 살펴보는 것이 더욱 좋을 것 같다. 특히 여름철에 무더위로 인해 땀으로 끈적거리는 몸을 씻어내는 습관은 거의 필수적인데, 여름철에 대비하느라고 통풍성 위주로 만들어진 집에서 맞는 겨울의 으스스함을 이겨내려면 더운 물에 몸을 담그는 입욕 문화가 발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일본인의 목욕 관습, 그 중에서도 온천에 아직 남아 있는 남녀 혼욕은 외국인에게 무척이나 진기롭게 여겨지는데, 이러한 것은 일본인의 성윤리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일본이 기본적인 음식 문화 역시 습기를 띤 무더위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대표적인 음식으로 막부 말기 경부터 시작된 ‘스시’를 들 수 있다. 이것은 밥이나 겨 또는 초를 가하여 유산의 발효미를 자아낸 발효식품으로 일본의 고온 다습한 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렇게 일본인의 생활문화, 즉 의식주 문화를 지진이나 습기와 같은 환경적 요인과 결부시켜 설명하는 것은 문화를 보는 하나의 견해로서 어느 정도 타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긴 하다. 그러나 하나의 자연환경과 그것으로 인한 문화적 대응이 아무리 우세하다 할지라도 그것 하나로 문화 전반을 모조리 해석하려 드는 것은 무리가 따르게 된다.


  충돌문화


  문화라고 하는 것은 다양한 측면을 가진 복합체이기 때문에 문화가 가지고 있는 하나의 측면을 가지고 결코 그 문화의 모두라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환경적 요인에 영향을 받아 형성, 변화해온 일본 문화가 어떠한 역사적 성격을 가지고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는가를 알아보는 것은 과거와 현재를 가로질러 그 문화 역사적 위치나 의미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문화에 대한 이해라는 것은 단절된 한 시대의 세부적 사항보다는 여러 시대를 거친 큰 흐름 속에서 그 흐름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와의 상호 작용이 없는 것은 이미 문화로서의 가치가 부여될 수 없는 것이라 하겠다.

  이런 의미에서 전후 일본 문화론의 변천 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라 하겠다. 이로써 최근 일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가를 알아보는 하나의 지표로 삼을 수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각 시기의 일본 문화론의 내용적 성격을 부정적 특수성의 인식, 역사적 상대성의 인식, 긍정적 특수성의 인식, 특수에서 보편으로의 4기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제1기에서는 일본 문화의 부정적 특수성이 주장되는데, 이것은 맑스주의적 발전 단계론에 의하든 근대화론에 의하든 일본 사회, 일본의 인간 관계가 전근대적이고 비근대적임을 지적한다. 즉, 일본적 전통은 반민주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이며, 시민사회와 민주주의 같은 근대성의 결여가 일본 근대화의 실패를 가져온 것으로 본다. 이러한 부정적 특수성으로서의 일본 문화의 인식은 패전에 따른 사회적 상황의 자연스러운 귀결로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제2기는 5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는데 이 시기의 대표적인 일본 문화론은 논단이나 지식인 서클을 넘어 일반을 대상을 삼으면서 일본 사회가 회생하려 할 때 일본인의 정신적 안정을 촉구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 하나로 서구 근대주의를 추종하는 일방적 발전의 틀 안에서만도 아니고, 또한 전통회귀라는 유형에 함몰할 것도 아니며, 일본과 서구의 절충적 생활양식을 인정하면서 영, 불 문화가 순수 문화임에 반해 일본 문화는 잡종문화의 전형임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는 잡종문화론을 들 수 있다. 이러한 견해는 변화된 사회 경제적 상황의 반영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데, 1952년의 정치적 독립과 한국전쟁 특수 경기의 시작으로 경제가 성장하면서 패전 후의 굴욕과 열등의식, 일본 문화의 봉건성, 후진성을 지적하는 부정적 시각으로부터의 전환이 가능해진 것으로 보인다.

  즉 일본의 독자성을 주장하는 한편, 선진 구미 제국과의 유사성을 강조하는 인식이 자신 회복에 기여하면서, 이 시기의 대표적인 일본 문화론은 비교문명론에 의해 일본 문화의 상대화를 가능하게 했다.


 모방문화


  제3기의 긍정적 특수성의 인식은 전, 후기로 나누어지는데 전기의 사회, 정치적 상황은 경제성장으로 인한 ‘풍요로운 사회’의 도래와 사토 수상의 장기집권에 의한 보수노선의 안정화로 특징화된다.

  이와 함께 일본이 세계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긍정적으로 인식하면서 일본 시스템의 우수성을 확인하려는 경제대국의 자기 확인의 욕구가 강력히 대두된다. 이때의 일본 문화론은 따라서 60년대 안보투쟁 이후 좌익논란의 쇠퇴로 인한 공백기를 메꾸면서 보수화 현상에 편성하는 성격을 드러낸다. 즉, 긍정적 특수론으로 의미변화를 일으키면서 일본 문화론은 상품화하여 대중매체를 지배하는 절대적 영향력을 지배하면서 대중 소비재가 된다.

  이러한 일본 문화론은 70년대 후기에 들어와 일본이 오일쇼크의 위기를 극복하고 그 위상을 더욱 공고히 하면서 한층 심화된다. 즉 서구화라는 관점을 버리고 선진 모델로서의 구미에 맞서는 일본의 독자성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강화된다.

  마지막 제4기는 ‘특수에서 보편으로’라고 특정 지을 수 있는데 여기서는 특히 일본식 경영관행이 외국에 이식될 경우 문제들의 단점을 노출시키기 쉽고 일본 국내에서도 더 이상 생산성을 올리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일본적 경영이 보편적 경영관행이 되기 위해 수정되어야 할 것을 제안한다.

  이상으로 전후 일본 문화론의 변용을 살펴보았는데 부정에서 긍정으로, 자기상실에서 회복으로, 전근대적에서 초근대적으로, 후진에서 탈산업화로, 모던에서 포스트모던으로 변용되어온 일본 문화론의 내용은 일본 사회가 고도성장하는 발전 궤도에 상응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패전과 근대화의 좌절에서 다시 일어서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해온 일본인의 진보와 발전을 위한 노력과 기대가 표현된 일본 문화론은 일본 문화에서 일본인의 주체성을 찾으려는 깊은 소망을 반영한다.

  그러나 부정적 특수성을 인식한 시기에서 역사적 상대성을 인식한 시기까지는 어떤 의미로든 열려 있던 일본 문화론이 긍정적 특수성을 인식한 시기로 접어들면서 폐쇄적 성격을 띠기 시작한다는 것, 즉 일본이 세계적인 위치를 높여 가는 과정에서 특수성에 갇혀버린 것은 하나의 역설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일본 문화론은 앞으로 보편으로의 전환에 좀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견해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이른바 개국론 못지 않게 쇄국론이 힘을 가지고 있음도 잘 인지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문화의 역사적 성격을 알아보는 과정에서 문화는 그 사회의 다양한 측면들과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생활대국적 문화


  여기서 문화에 대한 또다른 견해의 필요성을 알게 된다. 일본의 문화가 나타나는 사회적 맥락 속에서 문화의 모든 측면을 관련시켜 그 문화를 이해하려는 총체론적 관점 역시 일본 문화에 접근하려는 우리에게 좀더 객관적인 자세를 가지게 해줄 것이다.

  이처럼 일본 문화에 대한 근본적인 흐름을 이해하고 그에 접근한다면 우리가 문화로서 현대 일본을 판단함에 있어 더욱 정확한 일본의 실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일본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매일의 생활에 풍요와 여유를 실감하고 있으며, 다양한 가치관을 실현하고, 노력하면 보답이 있는 공정한 사회를 키워나가는 국가를 생활대국이라 부르고, 이의 실현을 목표로 삼고 있다.

  생활대국에 대한 여러 가지 조건 중의 하나로 창의성과 국제성을 중히 여기는 교육이 보급되고, 국민이 예술과 스포츠에 친숙해지고, 풍부한 개성 및 향기 높은 문화가 꽃피는 사회가 되어야 하는데 이와 관련하여 교육 및 예술문화와 과학기술은 국가와 사회 모든 분야의 발전 기반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처럼 예술문화의 대중화가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현대 일본에서는 이의 실현을 위해 여러 가지 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지역 문화진흥 특별 추진사업이나 국제문화 교류 정책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특히 기업의 예술문화 지원에 관한 내용은 우리 나라에서도 참고가 될만한 사항인 것 같아서 좀더 주의깊에 살펴보았다.

  한 국가의 문화 정책이란 반드시 문화에 관계된 모든 결정이나 비용을 국가가 전담해야 한다는 뜻으로 읽혀져서는 안 된다.

  특히 자유 민주주의를 지향하면서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채택하는 국가의 경우 중앙정부 내지 지방자치단체의 역할은 민간활동이 좀더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기반과 환경의 조성에 치중되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일본은 예술 활동 특별 추진사업과 진흥기금을 설립하는 등 관․민 협력의 예술문화 진흥책이 진행되고 있다.

  특히 기업이 예술문화 활동의 지원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데, 국민들 사이에 예술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오늘날에는 기업들이 경제와 문화의 연관을 중시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현재 우리나라는 예술문화의 지원이 빈약하고 대기업의 국민에 대한 서비스 기능이 요구되는 현실임을 생각해 볼 때 충분히 도움이 될 만한 정책이 될 것 같다.

  일본 문화의 기원부터 현대의 간단한 문화 정책이라는 관점에서 현대 일본의 한 단면을 살펴보았는데 여기서 알 수 있었던 놀랄만한 변화들이 문화적인 측면에도 일정한 영향을 끼쳤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것이 특히 한, 일 관계에서 문화가 차지하는 비중과 연관하여 좀더 적극적인 의미를 지니기를 기대한다. 그것만이 양국이 진정한 문화 국가로서 미래를 위한 동반자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기 때문이다.



왜적의 침략비책

  숙명적 조우


  우리와 일본은 숙명적으로 만난 이웃이자 때로는 원수이기도 하다. 비록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오고간 역사가 수 천년에 이르고 형제나라처럼 오순도순 살아오던 세월이 많았지만 400년전부터는 원수지간이나 다름없는 관계로 변했다. 지금도 우리는 그들로 인하여 입은 피해가 엄청나건만 살을 깎고 뼈를 저리는 아픔도 이웃이란 인연 때문에 꾹꾹 눌러 참으며 살고 있다.

  그러나 원래 타고난 기질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아주 달라 포악하기가 이리 같고 간사롭기 여우같아서 그들이 우리보다 약자의 위치에 있을 때에는 별의별 아첨을 떨다가도 어렵고 힘든 고비를 당한 것을 알면 영락없이 해코지를 하지 않고는 못 견딘다.

  이러한 사례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시기가 고려말 왜구들의 노략질이고 이로 인해 고려라는 나라를 망치게 한 주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또 조선 중엽 나약하기 짝이 없던 시기에는 갑작스럽게 떼거리로 몰려 와서 분탕질을 한 것이 곧 임진왜란이다. 이때 풍신수길이라는 매우 잔악한 괴수(魁首)가 앞장서서 저질러 놓았는데 이러한 바람은 끊임이 없이 계속되어 마침내 조선반도를 송두리째 삼켜 먹는 한일합병의 비운까지 이르게 되었다.

  지금 그들이 노리고 있는 수작도 이러한 음모를 계속하려는 조짐인데 이것을 알아차린 사람은 조선반도 안에 단 한 사람도 없는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들은 경제적으로도 엄청나게 성장하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세계에서 가장 강한 무력을 기르고 있다. 그들이 경제적 군사적 강국이 되면 이웃인 우리는 상대적으로 그 만큼 약소국이 될 뿐이며 언젠가 그들에 의하여 정복되고 예속되어 녹아 없어질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저 혼자만 살아남기 위하여 앞장서서 친일을 꿈꾸는 자만 늘어만 가고, 더구나 지도자라고 자처하는 자들이 더 한층 친일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일본과 가까운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자가 늘어가는 현실이니 머지않아 나라와 민족을 송두리째 넘겨주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장차 친일을 하는 자와 친일을 매도하는 자 사이에 파벌싸움이 일어날 것이 뻔하고 그러다가 ‘닭 쫓던 개 울 넘어다보기’로 영원한 식민지 백성의 길을 가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음부(陰部)에 꽂힌 비수(匕首)


  일본사관학교 훈련교과서에 조선반도(半島)는 한낱 전쟁연습을 하는 실습도구에 불과하다. 또 조선의 땅 모양과 지세를 이용하여 기습연습, 방어연습, 폭격연습 등 시믈레이션형의 모의전쟁도장(道場)을 만들어 두었다. 산맥과 강과 마을을 그려놓은 지도 위에서 갖가지 전술을 익히는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요시라(要時羅)가 그려간 지도를 비롯하여 조선 반도의 지도는 그들의 산악전, 도강전, 시가전, 상륙전 등을 연습함에 있어 시범적으로 활용되는 모델이 되어 왔으며 시험 문제도 가장 흔히 출제되고 있다.

  그에 비해 한국인의 대부분은 기껏 관광지도나 펴놓고 고속도로가 어디로 뻗어 있으며, 해수욕장은 어디에 있고 어디쯤 휴게소가 있으며, 어디로 가면 명산대천으로 가는가를 살필 뿐이다. 어느 산과 계곡에 어떤 고목이 서 있고, 어떤 모양의 바위가 있으며, 숨을 만한 동굴이 몇 개 있는데 만일에 대열에서 낙오되더라도 어떠한 풀과 나무뿌리를 뜯어먹고 연명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디에 어느 성씨가 몇 가구 살고 있고 젊은이가 몇이고 어린아이가 몇 명인지 알고 있는 한국인은 없다.

  그러나 일본 사관학교를 나온 자들이라면 이 정도는 상식적으로 다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느 동네는 과거 친일파가 많았고 어느 동네는 독립군 출신 후손이 많아서 민간인에게 대하는 정훈(政訓)활동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까지 정통(精通)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한국인은 없을 것이다.

  현재 일본의 병력이 50만으로 보면 이 50만명은 모두 중대장급 이상 장교로 사병이 아닌 점에 주목하여야 한다. 만일 팬토믹형 군편성 기준으로 얼핏 계산해도 125개 사단을 하루아침에 편성할 수 있는 규모다.

  그들은 조선을 정복하여야만 대륙으로 진출하여 중국이나 소련을 공략할 수 있고, 반면 조선반도를 빼앗기면 그들의 옆구리에 해당하는 구주(九州)가 정면공격 받게 되고 군사적으로 힘을 전혀 쓸 수 없다고 보기 때문에 ‘국방’하면 반드시 조선반도를 장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고 있다.

  지정학적으로 살펴보면 조선반도는 일본열도의 대륙 연결고리 역할을 하고 있으며 또 전략상으로 봐도 조선반도의 형상이나 위치는 일본열도의 중심부를 노리는 절구공이와 같은 것이다.

  일본열도는 조선반도를 중심점으로 하여 반호(半弧)를 그리고 있고 조선반도의 끝은 바로 일본열도 반원 모양의 가장 중앙이 되는 곳을 향하여 뻗어 있다. 조선반도라는 절구공이에 으스러져버린 형국으로 그 지형이 부서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일본열도는 조선반도란 단도에 찔려 버둥거리는 여우를 닮았다.

  조선반도는 그야말로 일본열도의 급소요 정확히 공략할 수 있는 날카로운 비수인 것이다.

  조선반도와 일본열도를 두고 대륙으로 도망치는 토끼와 헤엄치며 접근하는 늑대, 또는 태평양을 굽어보며 앞발을 들며 포효하는 호랑이와 말라 비틀어져 볼품없는 여우를 연상한다. 숙명적 만남을 눈여겨 지도를 응시해 봄직하다.


치명적 급소


  일본열도의 심장부는 동경을 중심으로 한 본주지방이지만 일본열도의 가장 치명적인 급소로 볼 수 있는 곳은 바로 중공업지대인 구주지방(九州地方)이다. 조선반도의 가장 끝 부분에 해당하는 부산이야말로 이 구주지방을 날카롭게 노리고 있는 칼끝이 되는 것이다.

  이 부산지방이 의미하는 칼끝이 자칫 내질러지기만 하면 일본은 그야말로 급소 중의 급소에 치명타를 맛보게 될 것으로서 그야말로 안성마춤격 형국인 것이다.

  일본 수도를 경도에서 동경으로 옮긴 까닭의 하나는 급소를 노리는 조선반도의 공격목표를 다소 비껴보자는 의도도 없지 않다.

  음양(陰陽)설에 따르면 조선반도는 대륙의 양기(陽氣)가 집중된 남성의 늠름한 성기와 같고 그 향하고 있는 곳이 태평양의 핵심이다. 그 앞에 걸치적거리는 것이 일본열도인데 태평양이라는 여성의 지저분한 음부와 흡사하다. 때때로 해양(海洋)의 기운이 강성한 때가 오면 일본열도에는 음습(陰濕)한 살기가 대륙을 향하여 침범하고, 반대로 대륙(大陸)의 기운이 왕성하면 일본열도로 은근히 스며들어 사악한 짓을 말리고 다독거려 아세아는 평화로운 태평연월을 구가한다.

  일본이 여러 차례 군대를 일으켜 대륙을 침략했던 형상은 곧 음탕한 여인이 젖은 엉덩이를 휘저으며 대륙쪽으로 접근하여 조선반도와 도킹하는 것과 같고, 또는 굶주린 여우가 앙상하게 말라비틀어진 몸뚱이를 추스르며 헤엄치는 모습과 흡사하다.

  조선반도를 성적 노리개감으로 여기며 접근하는 일본열도는 그야말로 창녀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암내를 풍기며 슬금슬금 따라 붙으려는 암캐 같기도 하다.

  그 창녀는 주기적으로 솟구치는 음탕한 욕정에 휘말려 사리를 분간하지 못한다. 담을 넘어 이웃집을 습격하기도 하고 앗아오기도 한다. 일단 음기가 발동한 그 모습에서 인간다운 모습은 찾아 볼 수 없고 흉악한 짐승으로 둔갑한다.

  부끄럽다는 것은 이미 잊은지 오래고 갖고 싶은 것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빼앗아야 한다. 흉물스런 긴 손톱으로 대륙의 면상을 할퀴기도 하고, 송곳니를 드러내어 드라큐라처럼 상대방 목덜미에 상처를 내기도 한다.

  일본열도는 가끔 야수가 되어 대륙을 음해하는 역사적 숙명을 안고 있다. 지금 그들이 또 움직이고 있다. 풀로토늄을 실어다 가공할 무기를 만들고 군대를 키워 평화군이란 탈을 쓰고 서서히 대륙의 남쪽에 군화발을 들여놓으며 어느 날 갑자기 대륙을 강간하려는 음모를 펴고 있다.

  이 움직임은 장차 무서운 세계적 종말을 예고하고 있다.

  그들은 일본에만 살고 있는 그들의 천연기념물 일본원숭이의 후손들처럼 생긴 모습의 인물, 풍신수길이라는 자의 망령에 의하여 전율(戰慄)할 날이 멀지 않았으며 많은 희생이 그 대가로 치루게 될 것이라고 예견되고도 남는다.


  혼동비책(混同秘策)

  덕천막부(德川幕部)1)는 쇄국정책을 써 임진왜란 이후 양국간에 분쟁은 없었지만 일부에는서 조선정벌에 대한 논의가 오르내렸다.

  사또(佐藤信淵)2)란 자는 그의 저서 혼동비책(混同秘策)이란 가상의 전쟁각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마쓰에(송강-松江)와 하끼(적-荻) 등 병선에 많은 화기를 싣고 조선국 동쪽에 이르러 함경, 강원, 경상 3도의 여러 고을을 공략할 것이며, 하까다(박다-博多)의 병사는 많은 병선을 동원하여 조선의 남해안에 상륙하여 충청도를 점령, 황국의 군현(郡縣)으로 예속시키고 계속 진군 또 진군하여 발해(勃海)에 일본제국의 군사적 위엄을 만방에 떨쳐…운운.’

  이렇듯 동북아시아에 대한 정복 욕심을 드러내기도 했으며 이에 동종하는 패거리도 많았다.

  하시모도(교본좌내-橋本左內)의 만한경략론(滿韓經略論), 요시다(길전송음-吉田松陰)의 조선공략론(朝鮮攻略論), 히라노(평야국신-平野國臣)의 해외정벌신무필승론(海外征伐神武必勝論)등 비슷한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러한 주장에 따라 북으로는 북해도(北海道島)를, 남으로는 오끼나와(충승-沖繩)를 아우르며 소련의 남진정책을 저지하고 동북지방 연안의 제해권을 장악하기 위한 음모를 개시하게 된 것이며 조선반도를 장악하기 위한 음모가 그 중 제일 선두에 꼽히고 있었음은 거듭 말할 여지도 없다.

  이때의 주장은 ‘부국강병과 아시아 연대’라는 입장이므로 후꾸자와(복택유길-福澤諭吉) 같은 자에 비하면 온건한 파로 인정받는다니 그들의 대륙진공은 필사적인 것이다.

  작고 못난 왜놈의 종자(種子)로서는 동양열강(東洋列强)과 어깨를 겨룰 수 없으므로 유신(維新)을 통해서 대개혁을 이루려 한다면 이 열세한 종자부터 갈아치우자고 주장한 자가 후꾸자와다.

  그리하여 서양종자와 우성결혼(優性結婚)을 시켜야 한다는 것이고, 한편 일본 민족이 사용하고 있는 문자를 없애고 프랑스어를 그대로 옮겨서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 후꾸자와라는 소위 일본의 선각(先覺)들의 착안이다. 이 극단적인 생각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음을 그들의 화폐 그림에서도 눈여겨 볼 수 있다.

  현재 일본 TV에 나오는 광고 모델은 대개 서양인을 많이 활용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자신들을 내세워 보았자 신통한 이미지를 살릴 수 없을 뿐더러 민족개조라는 대명제 아래 어깨가 딱 벌어지고 키가 크고 다리가 길쭉하게 늘어져 있으며 근육질이 단단하게 박혀 있는 모델을 계속 활용하여 그들 국민들로 하여금 선망(羨望) 하도록 유도하는 획책의 하나다.

  그들이 뽑는 미스일본도 프랑스 여인처럼 생긴 여성을 선호하는 것을 보더라도 상당히 깊은 의도가 숨겨져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알지 못하는 일부 이웃 한국인들 가운데에는 무조건 왜놈 것이면 사족을 못쓰고 그대로 닮아 보려는 폐단이 있어 염려된다.


*註 1) 德川幕部와 같은 명사는 이미 우리말 나름대로 불러 오던 것이니 만큼 그대로          덕천이라 부른다.

      2) 佐藤, 또는 伊藤은 사또, 이또로 불러도 무방하나 伊藤博文 등은 이박문으로             읽음이 옳다고 봄.



  낙엽 한 자락


  일본이 조선을 넘볼 그때는 바야흐로 동서의 열강들이 호시탐탐 식민지 확장을 획책하던 19세기 초엽으로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집어삼키며 거침없이 비대한 제국으로 팽창해가고 있던 시기였다.

  이때 일본의 경우도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프랑스, 홀란드, 러시아에 의하여 강제로 불평등조약을 맺으면서 식민지로 전락할 위기에 있었다. 하지만 약삭빠르게도 이러한 방법을 역이용하여 조선을 불과 20여년이 채 못되는 사이에 병탐하려 들었던 것이니 과히 이러한 방면에는 천재적인 소질을 갖추고 있는 풍신수길의 망령이 스며있는 종자라 아니할 수 없다.

  또 한번 임진․정유때 풍신수길이 조선에 병력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과 똑같은 ‘터지기 직전의 고무풍선’처럼 일본 민족에게 주어진 운명적 윤회(輪廻)는 역사의 반복과 더불어 결코 피할 수 없다.

  풍신수길이란 자는 원래 근거를 알 수 없는 자이나 주인인 적전신장(織田新長)에 의하여 우연히 발탁된 요물인 것이다. 모양은 일본원숭이를 닮았다고 하고 체구는 비록 작으나 꾀가 많고 영리해서 그 주인을 홀리기에는 딱 알맞은 물건이었던 모양이다.

  추운 어느 날 아침, 수길은 품속에 주인의 신발을 품고 있다가 주인의 환심을 얻게 되고, 바람부는 낙엽이 뒹굴고 있는 어느 가을 날 한 개의 낙엽을 남겨두면서 그의 주인에게,

  “가을이 일찍이 가는 것을 아쉬워하며 낙엽 한 자락을 남겨 두었습니다.”

라고 말하여 그의 주인의 마음을 여지없이 휘감아 버린 간악하기로 천재에 가까운 자였다. 마침내 그 주인을 죽이고 주인의 아내까지 강제로 취하였던 배은망덕한 자이다.

  그는 동남아시아는 물론이고 대륙의 강자 명(明)까지 아울러야 한다는 기발한 착상을 늘어놓음으로서 아직까지도 그의 이 망상을 잊지 않고 그를 신이라고 믿을 정도로 맹신(盲信)하는 자가 많다.

  이 불쌍하고 가엾은 종족은 또 다시 근질거려 오는 그 잔인한 습성을 자제하지 못하여 무기를 만들고 병사를 훈련시켜 남의 나라에 쳐들어 갈 음모를 꾸미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볼 때 과거를 들춰보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숙명에 따라 패망의 철퇴에 으깨어진 등을 구부리고 현해탄을 건너게 될 것이다. 아니면 그들의 누이와 계집들이 정복군의 가랑이 밑에 누어 요분질 떨며 달라벌이를 또 하게 될는지, 아니면 이번에는 종자도 씨도 말라 영원히 잊게 될 까마귀 망령들이 될지도 모를 사건이 서서히 무르익어 가고 있음이 불을 보듯 확실하지 아니한가?

  전 세계를 그들의 영토로 삼겠다는 망상을 한다는 그 생각이 불쑥불쑥 솟아나는 이 병, 이 병이야말로 기름을 지고 불 속에 들어가는 무서운 병임에 틀림없건만 이들과 이웃한 우리로서는 참으로 진퇴양난이 아닐 수 없다.

  어쨌거나 이웃을 잘 만나야 편한데 우리의 이웃은 극악(極惡)함이 골수에 들어 박혔다.


 정한전략(征韓戰略)


  풍신수길이 망상에 떨며 일으킨 임진․정유왜란에 대하여 학자마다 그 평가가 다르게 나타나고 있으나 대체적으로 마무리 지워지는 의견은 다음과 같다.

  임진란 이전의 왜와 조선의 관계는 조선이 부모이고 왜는 의붓자식 취급했었다.

  해마다 계절 따라 왜로부터 조공을 받아 왔으며 흉년에 식량을 얻어가기도 했지만 때에 따라서는 그들의 국내가 어수선함을 틈타 계통과 절차를 어기고 도적질을 해 가는 일부 무리도 없지 않았다. 고려말과 조선초에 극성을 부리던 왜구들이 바로 이런 종류의 도적 떼들이었던 것이다.

  국내정황이 점차 안정되었던 조선 초기에는 신하의 예를 갖추고 봉작을 받어가면서 식량을 얻어가기도 했으나 어디까지나 조선을 받들어 모시던 불평등한 관계였음은 사실이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을 마감, 덕천막부가 들어가면서 그들과 조선은 수신사를 보내고 그 이전 예속적 불평등 관계로 전환한 것이 바야흐로 임진왜란 이후의 큰 변화였는데 이것이 훗날 엄청난 화근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평등한 외교관계를 통하여 오는 동안 조선은 일본을 알기를 우습게 알고 얕잡아 봤지만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서양에 의하여 강제로 개화되면서부터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오히려 조선을 우습게 알고 조선을 병탐하려는 야심을 또 다시 불러일으키고 말았던 것이다.

  1868년 1월, 막부의 세력이 쇠퇴하고 왕정을 복고한 세력에 의하여 조선에 이 사실을 통고하는데 의례적으로 대마도주를 통하여 문서를 보내게 되었다.

  문서에는 ‘황상(皇上)’ 또는 ‘봉칙(奉則)’이라는 황당무계한 글귀를 넣어 보냈으니 그 당시 조선 정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강경파인 무리야마(삼산무-森山茂)등과 교섭사절의 일원인 사다(좌전소일랑-佐田素一郞)는 건의하기를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정한론을 주장하고 그 부관 히로쓰(광진홍신-廣津弘信)는 무력으로 정복할 것도 요구했다. 그들은 1870년부터 5년동안 줄기차게 주장했는데 이는 임진년 침략때 실패한 경험을 참작해서 다음과 같은 작전을 펴자고 했다.

  “조선은 단연 병력으로 취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선 10개 대대는 대장이 통솔하되 왕성을 공략하고, 6개 대대는 소장이 이끌고 경상, 전라, 충청도로 진격하고, 또한 소장이 이끄는 다른 4개 대대는 강원 경기로 진격하고, 또 다른 10개 대대는 압록강을 거슬러 평안, 함경, 황해 3도를 진격하면 50일만에 반드시 조선 국왕을 포로로 할 수 있습니다.”

  1875년 4월 23일자 건의서에 보면,

  “쇄국정치를 하는 조선을 가볍게 정복하려면 지금 군함 2척을 은밀히 파견, 조선과 대마도 사이 해로를 측량하면서 위세를 보여주면 교섭체결에도 유리할 뿐더러 조선의 복잡한 해역을 미리 측량하여 훗일의 큰일을 도모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라고 하여 외교교섭을 하는 척 하면서 이미 공략을 위한 계략을 꾸미고 있었던 것이다.


 안심일도(安心一到)


 이러한 건의를 받아들여 운양호(雲揚號), 춘일호(春日號), 정묘함(丁卯艦) 3척을 보내어 무력시위를 하게 하였는데 그 당시 그들의 해군은 철함 2척, 철피목함 1척이 전부여서 모두 동원한 셈이다. 이 때 운양호의 함장은 구주(九州)출신 이노우에(정상양형-井上良馨)란 해군소좌였다.

  운양호는 1875년 4월부터 부산 앞바다에 출몰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처음 있는 함대침략인 것이다.

  5월 25일 부산항에 예고없이 진입하여 연습을 한답시고 대포를 쏘면서 조선 관원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9월에는 영종도 부근에 정박하여 초지진으로 접근하자 조선 군사들이 포격하자 이에 응수하여 9월 21일 마침내 함포 사격하고 영종도에 상륙하여 35명을 살해, 16명을 납치하였다. 그러나 사망 1명, 부상 1명이란 보고를 하고, 포격은 조선과의 외교교섭을 성사시키기 위한 계획된 시위이므로 국제간에 문제 삼을 수 없는 것이라고 일축해 버렸다. 일본은 이미 내각차원에서 무력시위를 통하여 조선과의 교섭을 촉진시키는 것은 당연한 행위이며 정당행위라고 감싸고, 오히려 운양호에 대한 포격으로 손해를 보았으니 이를 배상하라는 억지를 부리면서 수호조약까지 체결하려고 획책했다.

  훗날 산변건태랑(山邊健太郞)같은 일본학자도 조선병합소사(朝鮮倂合小史)란 그의 저서에서 논하기를

  “이 배상요구는 괴이하다. 조선 포대의 사정거리가 짧아 운양호까지 도달할 수 없었으므로 운양호는 손해를 볼 수도 없었다. 오히려 예고없이 진입한 운양호쪽이 잘못한 것이다.”

라고 했다.

  1876년 2월 26일 전문 12조로 된 문건이 소위 ‘한일수호조약’ 또는 ‘병자수호조약’이란 이름의 불평등조약으로서 마침내 왜놈의 식민지가 되는 길로 들어서는 어귀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강화도 사건의 목적은 배상에 있음이 아니라 조선으로 하여금 먼저 개방을 하도록 하는데 있었다.

  1876년 1월 6일 전권대사 구로다(흑전청륭-黑田淸隆) 일행은 품천(동경-品川)을 출발하였다.

  군함 맹춘(孟春) 등 6척의 함대를 이끌고 거포 10발로 해전연습까지 하면서 1월 30일 강화도에 도착하여 협박공갈하자 2월 26일 전문 12조의 강화도조약이 어이없게 맺어졌다.

  이러한 조약방식은 1854년 3월 3일 미국 페리함대의 위협에 굴복한 신내천(神奈川)조약, 1858년 6월과 9월 사이 미, 영, 러 불, 화란 등 5개국과 체결한 안정(安政)조약을 뽄딴 것으로 당시 세계 열강들이 식민지 전략을 그대로 답습하고 실천하는데 불과 20년 만에 터득한 술책을 시험한 것이다.

  이보다 20년 전에 타계한 정약용(丁若鏞)이 장담하기를,

  “앞으로 일본은 결코 조선을 침략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비로소 공맹자(孔孟子)의 학문을 배웠으며 길들여졌다. 앞으로 일본은 조선을 부모의 나라로 받들지 언정 침략할 리는 전혀 없을 것이다.”

했다. 조선의 제일 가는 석학(碩學)의 판단이 이 정도이니 당시 우리 국내의 판단을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강화도조약 7조에는, ‘조선의 연해도서와 암초를 측량코자 하니 일본국 선박이 자유로이 왕래하도록 인준한다’라고 하여 곧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할 지도를 만들기 위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일군참모 본부조례 제9조에, ‘조선과 청국연해의 유사시 참획의 도략을 준비한다’와 같고, 조선정복 코스로 진입함이 틀림없었다.


 공갈일성(恐喝一聲)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준비를 하면서 풍신수길은 조선과 직접 전쟁하는 것을 피하고 바로 중원 대륙 깊숙이 침략함으로서 명나라의 항복을 받으려고 했다. 이는 전략상 군사력의 낭비를 줄이려는 속셈이었다. 당시 조선측 수신사로 다녀온 사람들도 그 눈치를 알아차리기는커녕 충성을 가장한 외고집만을 피움으로서 선조에게 아첨할 기회만 주었으니 천하간웅(天下奸雄)이라 자처하는 풍신수길의 의도(意圖)를 조금도 헤아린 자가 없었다. 그들이 바다를 건너오면서 동래부사에게 처음으로 보여준 행동도 공격의 구실은 오로지 ‘명나라를 칠 테니 길만 빌려달라’는 수작으로 두 가지 속셈을 아울러 노리고자 한 것이다.

  300여년이 채 안된 그 때, 또다시 그들은 공격을 하기에 앞서 싸우지 아니하고 조선을 병탐할 궁리의 하나로 외교조약이라는 음흉한 수단을 먼저 앞세우고 있는 것이다.

  강화도조약의 강행도 대륙침공을 위한 첫 단계로서 만일 이 조약이 성사되지 않았으면 조선과의 전쟁도 하여야 한다는 명치 9년(1876년) 1월 9일 작성한 ‘육군문서’도 있다. 그 핵심은 아래와 같다.

  ‘조선국과의 개전에 임하여 우선 1개 사단을 출정시키되 군함 5척으로 상륙을 돕게 한다. 전략물품은 탄약과 공성기계, 식료, 피복과 석탄… 으로 하며 제2출정 사단을 편성하여 일본중서국에 배치하여 유사시에 대비하고, 일왕도 대판(大版)으로 이주토록 하여 출정군의 본영으로 삼을 것’이란 내용을 봐도그 음흉함이 짐작된다.

  이 조약에 의해서 다음 해 10월 하나부사(화방의질-花房義質)가 대리공사의 자격으로 부산에서 남서해안을 끼고 측량하면서 북상, 11월 25일 조선정부가 외국인 성내(城內) 거주를 허락하지 않아 서대문 밖 청수관에 여장을 풀었다. 1878년 5월에는 동해안을 측량하면서 시위를 벌리기도 하고, 12월에는 부산항에서 동래부가 세금을 징수한다는 구실로 육전대를 상륙시켜 강압적으로 세금 징수를 못하게 하였다. 또 이를 구실 삼아 다음 해 4월 야마사끼(산기경칙-山崎景則) 소좌는 동래부사 윤치호와 판관 현석운에게 칼질하여 해를 입히고 주민들이 반항하였다는 구실을 들어 마침내 인천과 원산을 개항시키고 1880년 4월 17일 처음 일본 공사관을 두게 되었다. 공사관원 중에는 6명의 군인을 포함 40명의 관원이 근무하게 되었으니 이 6명은 임진왜란 이후 처음으로 이 땅에 주류(駐留)한 일본군이기도 하고 2차 왜란을 도발시킨 정복자 일본 군대이기도 한 셈이다. 그 악명은 미즈노(수야승의-水野勝毅) 보병대위, 마쓰오까(송강리치-松岡利治) 보병중위, 4명의 하사관이었다.

  이들은 조선인을 사주하여 조선내의 전략정보를 수집하는 일과 장차 조선 정복을 위한 친일파 양성을 위한 작전과 동족 분쟁을 사주하려는 음모를 꾸미는 일에 종사하게 된다. 이 때부터 친일파라는 종자도 태어나 민족의 오장육부를 요절내고 동포의 심장을 도려내는 일에 앞장을 서게 된다.

  친일종족은 끊임없이 태어나고 끊임없이 명멸하면서 아직까지도 끈질긴 삶을 이어가고 있다.


  친일종족의 잉태


 ‘나에게 삼척 보검이 있으니 피맛 못 본지 몇 해이던가

  (我有寶刀三尺强 血痕難認譏星霜)

  경성의 이 밤에 한바탕 개와 양을 번개처럼 베이리라

  (京城今夜一宵夢 紫電光中弊犬羊).’

  공사관주재 무관 미즈노 대위가 1882년 7월 23일 임오군란 때 일부 군인이 일본공사관으로 몰려오자 칼을 뽑아들고 독전하면서 외치던 것인데 경성부사(京城府史-제1권  p499)에 남아 있다.

  놈들의 눈에는 조선인이 한낱 개와 양처럼 보였으며 그러한 생각을 아직까지 버리지 못하고 있음을 장차 이 글을 마감할 때까지 계속해서 똑똑히 증명해 보이리라.

  바야흐로 동족상잔의 때가 다가오고 있다.

  일본은 친일세력을 양성하고 매수하여 방탄막으로 이용하였다. 친일세력이 점차 정부요직에 천거되고 종교, 문화, 의술, 상업, 사상 등에 관여시킴으로서 일본을 반대하는 세력의 앞잡이로 내세웠다. 동족끼리 다투게 함으로서 방휼지쟁 어부지리(蚌鷸之爭 漁夫之利-황새와 조개가 서로 싸우다 둘 다 어부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고사)를 노리고 있었으며 그 당시 나라를 걱정했던 분들의 글에서 많이 인용되면서 경고하였건만 이를 깨닫는 이가 없었고 다투어 친일파 되기를 자원하는 자가 늘어만 갔다.

  임오군란 역시 동족상잔을 꾀임당한 사건 중 하나이다.

  1881년에 별기군(別技軍)이란 신식군대를 창설하고 일본 공병소위 호리모도(굴본예조-掘本禮造)로 하여금 교련을 가르치게 하였다. 그 처우에 있어서도 구식군대와는 현격한 차이를 두어 구식 군졸들의 반감이 점점 더 고조되어 갔다.

  이것은 군란을 유도하기 위한 계략의 첫 번째이다.

  일본 상인들은 미곡을 일본으로 반출하여 갔고 한성에는 쌀값이 금값이 되어 군량(軍糧)창고지기들을 매수 당하도록 유도하였으며 이로써 모래 섞은 녹미(祿米)가 배급되니 이것이 그 다음 두 번째 계략이다.

  분통이 극도에 달한 구식 군졸은 별기군 교관 굴본예조 소위를 죽이게 되는 반일감정 자극의 묘책을 써서 군대 증강 투입의 구실을 만들었다. 이러한 공식은 영국이 저지른 아편전쟁, 일본이 꾸민 천진폭동, 상해사변 따위가 모두 이런 유형의 군사침탈 모략방식이며 군사도발 핑계로 이용했다.

  ‘북한에 핵무기가 있다’ 또는 ‘남북이 통일되면 군사력이 극동에서 가장 강대하다’는 등 떠들며 핵무기를 공식적으로 개발하고 군사력을 증강하는 등의 현대판 음모가 목전에 와 있기는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그 방식의 차이는 전혀 변하지 않고 있다.

  별기군의 모집은 주로 당시 친일파에 속하는 대신들의 자제 100명을 뽑아 편입시킨 것이 특징인데 얼마 안 되는 신식소총을 본 친일파들이 민비를 꼬드겨 이러한 비극의 알을 잉태하였다. 이 알이 뱀알처럼 부화되면서 탈은 조선인의 탈을 썼으되 행세는 엉뚱하게 왜놈 행세를 하면서 같은 동족을 수없이 많이 물어 죽이고 잡아죽였다.

  반만년이래 처음 우리 한민족이 스스로 민족부흥의 기회를 맞이하였었는데 아깝게도 왜놈과 친일놈들의 등살에 못 이겨 민족과 국토마저 팔아먹는 비극을 연출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바보 청춘들(馬鹿靑春)


  불과 몇 명의 왜놈이 죽은 일을 사건으로 만들어 배상을 요구하는 한편 자구책이라는 명분을 살려 군대 주둔을 적극 추진해서 점점 침략의 마수를 뻗쳐보려고 제 4단계 공식을 인용하려 했다.

  1882년 7월 31일 일본국 각의에서는,

  ‘만일 담판이 어려울 경우에는 군대로 하여금 인천을 점거하고 거제 또는 울릉도를 점령하므로서 계속 배상을 촉구하는 것이 타당한 방책이다’라고 했다.

  이리하여 군함 4척의 비호를 받은 1200여명의 대병력이 인천에 도착했고 육군소장 다가시마(高島柄之助) 해군소장 니이레(인례경범-仁禮景範)가 육해군의 우두머리이며 그 중 대라우찌(사내정의-寺內正毅)가 당시 소좌로서 보병대대를 이끌고 따라왔었다. 이 자는 후일 조선 총독으로 와서 못된 짓을 하던 자이다.

  청국군함이 이미 하루전 8월 1일에 4000명의 병력을 끌고 인천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으며 마건충, 오장경, 원세개(馬建忠, 吳長慶, 袁世凱)가 그 우두머리였다. 청국군대는 대원군 이하응이 불러들인 것이다.

  일본공사 하나부사는 성내로 공사관을 옮겼다. 지금 충무로 2가에 있었던 이종승의 집과 을지로 2가에 있는 장락원에 병력을 주둔시켰는데 이는 국법으로 금지하였던 것을 어기고 쳐들어 온 것이다.

  이로서 8월 30일 일본함대 위에서 제물포조약이 맺어졌는데 그 내용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본 공사 내에 병사를 약간 둔다. 병영의 설치와 수선은 조선국이 책임진다. 장차 조선국이 법률을 지켜 난동하는 일이 없어 병력이 필요 없다고 생각되면 철수할 수도 있다.’

  조선 대신들의 어리석음을 이용하여 간교한 장난을 쳤으며 오늘의 외교 문서상 웃음거리 중 하나가 되었다.

  이로서 일본은 몇 놈의 고깃덩이를 흥정거리로 걸고 침략의 제 1보인 주병권(駐兵權)을 확보하고 장차 무력으로 조선을 전복할 채비를 완벽하게 쌓아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실로 누어서 팥떡을 먹듯이 조선을 병탐하려는 일본의 술책은 바로 미국, 영국, 불란서, 독일, 화란 등 서방국가가 식민지를 만들어가던 교과서를 각본 삼아 그대로 빈틈없이 진행되어 갔다.

  그 다음은 갑신정변(甲申政變)이란 계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치적 배경은 청국군대 4000명이 한성을 장악하고 있는 가운데 왕실은 대원군에 의하여 반일파가 장악하고 있어 일본으로서는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 대세를 장악하여야 하는 입장에 있었다.

  시마무라(島村久) 서기관은 1884년 11월 4일 개혁의지에 불타고 있는 젊은이 서광법, 김옥균 등에게,

  “한성에 주둔하고 있는 청병 쫓는 일은 우리 1개 중대로서 가능하다.”

라고 했으며 새로 부임한 다께조(竹添進一郞) 공사의 다음과 같은 본국 보고서에도,

  “청국의 현재 병력은 우리 1개 중대로서 충분히 격퇴할 수 있고 그(김옥균?)를 보호할 준비도 되었음.”

등 왜놈들이 철없이 마구 짖어대는 호언장담에 이 광경을 바라보던 김옥균을 비롯한 당시 신세대로 자처하던 조선의 젊은이들은 그만 넋을 잃고도 남았을 것이다.

  1884년 12월 4일 21시 우정국 낙성연에 변란을 유도한 일본군은 청군에 의해 도륙이 되면서 김옥균 등을 앞세워 도망간 3일천하란 연극이 역사의 현장으로 아직도 우리의 가슴을 섭섭하게 하고 있는데 이러한 것들도 거의 허풍과 무모가 앞선 한낱 무리들의 호언장담이 낳은 결과였다.

  단 150명의 깡패집단으로 4000명의 훈련받는 중국군대를 쳐부술 수 있다는 발악에 가까운 왜인들의 호언에 정신을 잃어버린 김옥균 등 친일개혁파의 경솔한 행동에 대해 역사는 아직도 침묵으로 왜곡시킨다.

  왜놈들은 가끔 한두 번씩 적극적으로 들먹이는 과거지사에 대하여 조선의 언론은 거품처럼 흥분하다가 잠이 들고 말지만 놈들의 전략은 지금도 시시때때로 천년을 두고 이어지고 있음을 알면서 사는지, 모르면서 굼벵이처럼 사는지…….

  반복하는 역사의 움직임에 게으름을 피우는 학생들! 그들도 어른이 되면 건망증에 휘감기는 토끼들이 될는지…….

 

관동군 120사단


  빼앗긴 교실


  1944년 11월 관동군 120사단이 대구에 주둔하면서 당시 소학교 2학년생이었던 나는 책보따리를 등에 메고, 무거운 걸상을 짊어지고 읍내 예배당 안으로 옮겨갔다. 예배당은 살고 있던 집 근처이기 때문에 나는 속으로,

  “핵교 가까우이 잘됐네” 하였다.

  넓은 예배당 안에는 1학년부터 3학년까지 학급 구분도 없이 옹기종기 모였고 담임은 제가끔 목소리를 높여 떠들었다. 책을 펴들고 읽어내려 가는 선생도 있고 이야기를 하는 선생도 있어서 이야기 잘하는 선생쪽으로 귀를 기울일 때가 많았으나 눈의 방향은 담임선생에게 두었다.

  음악시간에는 학년 학급을 가릴 것 없이 교회 풍금소리에 맞춰 모두가 한 반처럼 불렀다. 물론 왜군들이 침략할 때 부르는 군가뿐이지만 목이 터질세라 부르고 또 불렀다.

  2박자로 된 행진군가를 부를 때에는 예배당 판자마루가 쿵쿵하고 울리도록 발을 맞추면서 제자리걸음으로 걷기도 하고 빙빙 돌며 병아리 떼처럼 외쳤다.

  이 교회는 어머님이 다니시는 교회였는데 가끔 어머님을 따라 교회에 와서 예배도 보고 놀던 곳이었다. 발걸음도 조용히 걸어야 한다고 어머님으로부터 주의 받던 곳이라 왠지 모르게 콧물이 많아 눈치껏 훌쩍이던 이곳에서 군가를 우렁차게 불러대고 발을 쾅쾅 굴러 본다는 것은 신나는 일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우리가 예배당으로 교실을 옮긴 후부터는 엄숙한 모습의 목사님도 못 봤고 어머님 역시 노는 날에도 빨래만 할 뿐 교회에 가실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교회 다니는 사람은 모두 잡아간다더라.”

  라는 말이 떠돌아다니기도 했다.

  방구석 어디서나 보이던 어머님이 소중하게 지니고 계시는 책은 구경할 수 없었고 일요일에는 동생을 업고 나의 학교이자 어머님의 교회인 그 예배당에 놀러갔다. 조용한 마당에 풀잎만 굴러다니고 사람들의 발걸음이 뜸하여 썰렁한 기분이 들었다.

  하루는 양지바른 계단 앞에 동생을 앉혀 놓고 담벽 아래에 있는 코스모스 꽃씨를 훑으며 이것을 우리 집 담안에 가지런히 뿌려볼까 생각에 열중하고 있는데 동생이 발을 동동 구르며 울었다.

  “히야! 추워! 집에 가. 앙앙”

  동생이 아파하는 곳이 발인가 하고 우선 발바닥을 뒤집어 보고 내 발바닥도 들여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동생의 발바닥에 이상이 있었다. 동생의 발바닥은 잔금이 수없이 많고 내 발바닥처럼 굵은 금이 하나도 없었다. 놀랜 나는 즉시 동생을 둘러 업고 집으로 돌아 와서 어머니에게 숨이 넘어갈 듯 울먹이면서 황급히 말씀드렸다.

  “엄마! 큰일 났어. 야가 많이 아픈가 봐?”

  어머니는 동생의 이마를 만져 보신 후 내 손을 꼭 잡으시며 빙긋 웃기만 하셨다.


  부러진 복깽

  나는 운이 나쁜지 1학년부터 2학년까지 줄곧 마쓰오까라는 이름의 조선사람 선생이 담임을 맡아 사사건건 트집을 잡은 바람에 풀이 팍 꺾여 지냈다.

  마쓰오까 센세이는 나이도 들만큼 든 중년남자로서 키도 크고 말씨도 우렁찬 사내였다. 그는 유독 조선 학생들에게만 호랑이처럼 으르렁거려 나도 그 앞을 지나치거나 혹 잘못으로 불려가기만 하면 오금조차 펴지 못할 뿐 아니라 말도 더듬더듬 했다.

  이 마쓰오까 센세이는 조선인은 나무를 칼처럼 다듬은 ‘복깽’을 허리에 차고 눈을 부라리면서 다니는데 그의 눈에 잘못 걸렸다 하면 어깨고 종아리고 구분 없이 퍽퍽 소리가 나도록 후려 팼다.

  내가 그의 복깽에 잔인스럽게 맞았던 사실은 50년이 지난 지금 새롭게 떠오른다.

  우리 학급에는 왜놈 학생이 몇 놈 섞여 있었고 모든 책은 왜놈말로 쓰여 있었다. 평소 집에서 하던 말을 무심코 중얼거리기만 하여도 그 날 변소 청소는 맡아놓고 해야 했다. 우리말을 한다고 하는 사실을 마쓰오까 센세이라는 조선인에게 일러바치는 자는 주로 왜놈 종자가 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 같은 조선 학생들 중에서 공부께나 한다고 하는 자, 까만 제복을 맞춰 말쑥하게 차려 입었다고 하는 그런 종류의 자식들이 잘 일러바치곤 했다.

  그래도 그때는 조선놈끼리는 일러 바쳤다 해도 별 괘씸한 생각보단 다소의 동정심도 아닌 그저 측은한 생각 같은 것이 들어서 반감이나 적대적 감정은 없었다. 다만 왜놈이 그런 고자질을 했다 하면 그저 박살을 내려고 벼르기도 했다.

  하루는 집으로 가려고 다리를 건너는데,

  “나강끼! 니강끼!”

  내 왜놈식 이름을 부르며 뒤따른 놈이 있었다. 바로 두 명의 왜놈이었다.

  “뭐라꼬? 니 머라켓노 이놈아야.”

  나는 팩 고함을 쳐서 기를 돋우었더니 따라오던 두 놈은 내 작고 처진 눈초리를 보고서 슬금슬금 피하는 척 하더니 저희끼리 눈을 맞춰 ‘개다’라는 그놈들 나무 신발을 벗어 들고 덤벼들었다. 덩치는 나보다 크지만 그래도 나는 어릴 때부터 낙동강가 모래사장에서 배운 씨름 솜씨도 있고 평소 집안팎에서 소문난 깡다구 기질이 발로되어 순식간에 두 놈을 거꾸러뜨렸다. 한 놈은 도망가고 한 놈을 타고 앉아 목을 사정없이 졸랐다.

  “쾌엑! 쾌엑!”

  놈은 눈알을 굴리며 죽는 시늉을 하기에 고무신짝으로 낯짝을 때려주고는 집으로 돌아왔지만 내일 일어날 꼬락서니를 생각하니 마음이 불안했다.

  그 이튿날 아침 일찍, 그 마쓰오까 센세이라는 조선인 무법자에게 끌려간 나는 냄새 고약한 변소 뒤에서 그 ‘복깽’이 두 동강이 날 때까지 두들겨 맞았다. 뒤늦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오셔서 간신히 집까지 옮겨져 왔는데 부러진 곳은 없어도 전신에 시퍼런 멍이 구렁이 감은 것처럼 돋아났었다. 그리고 해방되던 날 안 일이지만 마쓰오까는 ‘이XX’로 이름을 바꿨다.

  지금도 낙동강 모래사장에 내려서면 그 왜놈 자식이 내 발밑에 목이 깔려 숨을 몰아 쉬면서 “쾌액! 쾌액” 하는 몰골이 가끔 떠오른다.


 망할 때가 되었다


  관솔을 따러 갔다. 소나무에 붙어 있는 관솔이라고 하는데 소나무공이에는 송진이 붙어 있어 옛날 전등이 없거나 기름대신 이를 모아 밤에 불을 밝혔다.

  끄으름이 많이 나서 방안에서보다는 주로 야외행사 때 쓰였는데 바람이 불어도 잘 꺼지지 않고 오래가는 것이 특색이다.

  처음에는 4학년 이상만 따오라고 하더니 1945년 봄에는 1학년까지 책임량을 지정하여 가져오라고 했다. 집에 있는 장작더미에 붙어 있는 관솔을 따다 주다가 결국 그것으로는 책임량을 다 못해 할아버지를 모시고 산에 올라 소나무공이를 찾아다니게 되었다. 내 키보다 더 길고 큰 굉이자루를 들고 아무리 휘저어도 단단히 붙은 솔공이는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질긴 솔가지를 뜯어내느라 이빨로 물어뜯어도 하고 손톱으로 긁어 보기도 했는데 솔공이 하나를 캐는데 한나절을 그냥 보내거나 하루를 산 위에서 그냥 보낼 때도 많았다. 솔공이가 무겁기는 또 꽤 무거웠다. 산꼭대기에서 짊어다 집에 가져다 두었다가 학교에 가져가서는 공부가 끝나는 오후에 관솔기름을 짠다고 하는 공장까지 운반해야 하는데 어린것들이 들짐으로 져다 날라야만 했다. 지금 생각하면 약 20여리는 됨직한데 등골에 박히는 고통과 아픈 다리를 질질 끌며 걸어가는 어린 우리들의 얼굴에는 추운 겨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땀방울이 눈을 적시고 앞을 가렸다.

  1945년 3월 25일 유황도의 일본군이 전멸하였다. 4월 1일에는 미 해병대가 오끼나와를 점령하고 그 다음은 구슈를 공격코자 할 때 일본군은 만주에 있던 소위 막강한 관동군을 풀어 반도의 남단을 거점으로 제주도를 교두보로 하여 일본 본토로 진격해 들어갈려는 미국군의 주력을 협공하고자 하였다.

  이로써 일본군의 불리한 전세를 만회하려고 하는 한편 일본 본토가 전쟁의 중심이 되는 것을 피하고 한반도를 전쟁의 중심으로 유인하여 이 땅을 쑥밭으로 만들려는 속셈도 아울러 계산하고 있었다.

  이러한 짐작은 그 당시 일본군의 병비증강 상황을 눈여겨보면 여실히 드러난다. 악랄한 자는 언제 어디서나 못된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45년 3월부터 5월 사이에 특히 제주도를 중심으로 하여 나남, 고창, 이리, 부안, 군산, 서천, 신태인 등지에 병단이 속속 들어섰고 이들은 주로 함경북도 경원, 남양, 도문, 동관 등지에 주둔하고 있던 관동군으로서 79사단, 96사단, 150사단, 160사단 등이 재편성 또는 혼성의 형식으로 창설하여 남하시켰던 것이다.

  이외에도 위수사령부를 서울 용산, 대구, 광주에 별도로 분구를 두어 확장시키는 등 경상, 전라, 충청지방과 제주도를 전쟁터로 만들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45년 4월 15일에는 서울 용산에 있던 58군사령부를 설치하고 5월 하순에 걸쳐 배치 완료했다.

  이로서 제주도에는 무려 8만의 병력이 동원되어 미군의 구슈열도 진공을 간접적으로 저지하며 그 예봉을 한반도로 돌려 마지막 혈투를 이 강토에서 벌려보려고 애를 썼던 얌충머리 없는 작당을 서슴없이 했던 것이다.

  

  얌체전략의 괴멸


  45년 5월 30일 관동군은 중국 북부지역과 만주 전역을 포기할 정도로 전략을 다시 수정하여 오끼나와를 발악적으로 사수하려 하였다. 그러나 오끼나와는 6월 25일에 함락되고 이를 기지로 미군의 제해권과 제공권이 확장되었다. 이리하여 남한 일대의 선박과 항공이 통제되면서 병력은 대개 야간에만 이동하지 않을 수 없었고 남한에서 병력을 대거 징발하려 하였으나 이미 징용과 학병으로 끌려간 뒤였다. 이 때의 병단은 22개부대에 2만명 정도를 넘지 못한 취약한 상태였다.

  재향군인 중 늙은이도 뽑았고, 조선인 징병자도 훈련도 시키지 않고 군대에 편입시켰다.

  이상 45년 2월 11일 이후 반도에 동원된 일본군의 군사력은 1개군, 4개 사단, 5개 위수사령부, 직할여단 및 30여개의 병단을 통틀어 10만도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조선반도를 최후까지 사수하면서 영원한 식민지로 갖고자 한 음흉한 술책과 아울러 본토로 향하려는 미군의 정예를 유인하여 보려는 술책도 감추어져 있었다.

  막강한 관동군이라 할지라도 이미 정예군은 모두 말레이지아, 버마, 인도네시아 등 남방전투로 실어 보내고 나이 많은 군인이나 현지조달한 중국인과 조선인 혼성으로 형성된 상태여서 외형적으로만 숫자를 채운 정도에 불과했다. 유명무실한 군대이긴 하지만 피로에 지치고 다투어 전과를 올리려고 하는 공격군들에게는 좋은 미끼임에 틀림없었다.

  다행히도 미군은 옆눈 돌리지 않고 구슈로 다시 혼슈로 진격해서 반도에서의 전투는 간신히 모면할 수 있었다. 우리는 또 이 땅에서 청일전쟁과 같은 대리전쟁을 겪을뻔 했다.

  그로부터 5년 후에는 그보다 더한 민족상잔의 뼈저린 고통을 지금까지 되뇌고 있긴 하지만 여하간 이래저래 그놈들의 소행은 끝없이 밉고 또 미워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종자들임에는 틀림없다.

  이 종자들이 또 무기를 들고 아시아를 다시 침략하겠다고 하는 모의를 한다고 한다.

  그 전쟁 이후로 이제 겨우 45년밖에 지나지 않았고 그때 그 어린아이가 늙은 노인이 되어 걱정을 하고 있건만 사람들은 망각증 들린 쥐떼처럼 곧장 잊어버린다.

  또 한차례의 비바람이 몰아 천둥번개로 크게 한 번 놀랄 것이고 벼락이 그 악독한 종자를 싹쓸이 할 날이 가까워 올 것만 같다.



저자 약력

경북 예천 호명 출생

60년대부터 10여년간 노동조합 운동 전개

모교인 고려대학 부설 노동문제연구소 연구원 재직

1975 국회도서관 입법조사국 조사관(3급갑)

1978 노동부 노정국 보험국 지방기관장역임(안동,통영)

1997년 『문예와 비평』지에 수필 「윗니 없는 소」로 등단

1995 근로복지공단 지사장, 국장 ,전산운영실장

◇저서 및 논문

한국 노동관계문헌 목록, 노동도서 분류표목 해설(1975)

노동 도서관 지도운영방안(1976)경영과노동,노동문제발표

외국의 소비자보호제도 번역(1976)국회도서관 간행

노동쟁의 조정제도의 각국비교(1984)한국노총간행

합리주의와 실종주의 비판(1987)고대노동문제연구소 간행

노동문제의 접근시각(1987)고려대노동문제연구소 간행

노동 상황논리 외 다수(1988)중앙경제 연제 간행

노동쟁의 권모술수(1991)  금영사 간행



판 권

소 유




        윗니 없는 소

 

             1997년 12월 10일 초판 인쇄

             1997년 12월 20일 초판 발행


                                지은이 :   觀  熙

                                발행자 : 남  순  종

                                발행처 : 글  벗  사

                   서울시 용산구 한강로 3가 40-129

                     전화 795-5589  FAX 795-5590

                    등록 1980년 3월 13일 가 제3-87호

 

             ※파본은 교환해 드립니다.   값 8,000원



추 천 사


  틈틈이 써온 글을 책으로 펴내겠다며 인사를 왔기에 같은 일터의 한 사람으로서 먼저 경하를 드리면서 가슴 뿌듯한 감회와 함께 한다는 즐거움이 앞섭니다.

  저자는 한국의 노사관계개선에 앞장선지 어언 30유여의 세월을 바쳤습니다. 그 동안 터득한 체험과 경륜을 집약하여 이미 두 권의 저서와 다수의 연구논문을 발표한 바 있고 평소 남다른 면모를 보여온 바 있으며 현재에도 공단의 정보화 추진을 앞장서 줄기찬 노력을 기울여 가고 있습니다.

  금년은 그가 육순을 넘기는 해 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젊습니다.

  유창한 필치와 유머러스한 표현을 통한 풍자, 통쾌한 비판력, 그리고 그의 폭넓은 사고력과 탁월한 투시력은 오히려 오늘의 젊은이들에게 적절한 교감(交感)을 불러일으키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특히 비단 위에 금실로 수를 놓은 것처럼 『문예와 비평』에서 수필부문에 작가로서의 추천을 받았다 합니다. 앞으로 당대에 훌륭한 문필가로서 시대적 아픔을 잘 어루만져 주는 역할을 맡게 된 것은 물론 저자의 영광이자 우리 모두의 자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시시각각으로 변화를 모색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 책이 우리 모두의 빛이 되어 살뜰한 희망을 주고, 소금처럼 맑고 깨끗함을 지켜주는 역할을 한다면 본인 역시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 될 것입니다.

                     1997년 12월

근로복지공단 이사장  박 홍 섭

 

이관희 수필모음        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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