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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노동에 관한 회칙 [노동하는 인간]  2 
존경하는 형제들과 사랑하는 아들 딸들에게
인사드리며 사도적 축복을 보내는 바이다
교황 요한 바울로 2세의 사회회칙

제2장 노동과 인간

4. 창세기에 나타난 노동

교회는 확신한다, 노동은 인간의 삶에 근본적인 것임을. 이 확신은 학문에 의해서도 뒷받침되고 있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계시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노동이 인간의 삶에 근본적이라는 것은 지성의 확신이며 또한 신앙의 확신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교회가 인간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말씀도 이를 뒷받침한다. 창세기의 맨 첫 장에서부터 교회는 노동이야말로 인간 삶의 근본임을 믿을 만한 이유를 발견한다. 그 표현방법이 진부하기는 해도 이 대목은 바로 창조의 맥락 속에서 인간에 관한 근본적인 진리를 표현하고 있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남자와 여자로"(창세 1,27) 창조된 인간이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다스려라"(창세 1,28) 하는 말을 듣는데, 여기서 노동이라는 말은 언급되지 않지만 의심할 여지 없이 인간은 노동을 해야 함을 의미한다.

노동하지 않고 어떻게 땅을 다스릴 수 있는가?

땅을 다스리라는 명령을 들은 것만으로도 인간은 하느님을 닮은 존재이다. "땅을 다스림"은 창조주 하느님을 닮는 노동이다. 노동이 주체인 인간 안에서 시작되어 외적인 객체를 지향하는 행위로 파악된다면, 당연히 인간은 "땅을 다스리는" 것이고 노동이 이 다스림을 더욱 완성시킨다.

성서에서 땅을 다스리라는 표현은 오늘날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우주 공간에서 모든 자원을 발견하고 이용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성서의 말씀은 이해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항상 새로운 것이어서, 이 말씀도 지난 날의 문명, 오늘날의 현실, 그리고 미래에 다가올 발전과 심지어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것들도 담고 있다.

'가속화되어 가는 발전'의 세기를 논한다 하더라도, 그 변화가 아무리 빠르고, 또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고전 중의 고전인 성서 안에 담겨 있는 이 근본적인 의미를 바꿀 수는 없다.

사람들이 땅에 대한 다스림을 더욱 더 뻗쳐가고 또 굳혀가기는 하지만 창조주께서 본래 뜻하신 바, 하느님의 뜻대로 땅을 다스리라는 테두리를 벗어나지는 못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남자든 여자든, 땅을 다스리시는 "하느님을 닮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땅을 다스림"으로써 하느님을 닮게 되고, "하느님을 닮음"으로써 하느님의 뜻대로 땅을 다스리게 된다.

이것이 오늘날에도 앞으로도 계속되는 창조 과정이다. 사람들이 하느님을 닮은 존재인 인간으로 창조되어 가는 과정이다. 하느님은 영원히 세상과 인간의 창조주이신 것이다.

그래서 "땅을 다스림"은 전우주적인 과정이요 영원한 과정이다.

이는 모든 세대에 걸쳐, 경제적이고 문화적인 발전의 모든 단계와 모든 사람들을 다 포함한다.

"땅의 다스림"은 이렇듯 보편적인 동시에, 개인들에 대해서도 전인적이다. 각자의 내면 속에서도 이 일이 일어나고 있다. 사람은 육체만으로 노동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으로도 더욱 노동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인격으로 표현되는 영혼이 노동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노동자의 인격이 무시된다면, 그것은 인간의 노동이 아니라 노예의 작업이리라. 노예의 작업은 삶에 아무런 향상도 가져오지 못한다. 오로지 인간의 노동만이 삶을 향상시킨다.

이렇게 모두가, 모든 사람이 보편적으로 또 전인적으로 노동을 통해 "땅을 다스림"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5. 노동

인간이 땅을 다스림은 노동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노동은 인간이 하는 일, 즉 하나의 대상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서 노동도 진화되어 왔다. 인간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얻기 위해 동물을 길들임으로써 그리고 땅과 바다에서 자원을 얻음으로써 땅을 다스려 왔다.

더 나아가, 인간이 토지를 경작하고 거기서 얻어진 경작물을 가공할 때에도 인간은 땅을 다스리는 것이다.

그래서 노동을 통한 농업은 경제 활동의 핵심을 이룬다. 공업도 역시,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인간의 노동을 통하여

땅을 다스림에 관계되어 있다. 서비스 산업과 연구 작업 역시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인간의 노동은 대부분 기계의 도움을 받고 있기 때문에 순전한 육체 노동은 거의 없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산업 시대 초기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전자 분야와 정밀 분야에 있어서 커다란 변화를 가져 왔다. '일'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기계이고 인간은 그저 감독하기만 할 뿐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바로 그같은 이유 때문에 산업의 발달은 인간의 노동에 대하여 새로운 안목을 암시한다.

'노동자 문제'를 야기시킨 산업의 초기 형태와 최근의 변화들은 모두 노동이 아무리 기계화된다고 하더라도 일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더욱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인간은 노동의 주체인 것이다.

산업의 발달은, 특히 소형화와 전기통신 같은 분야에서 노동의 주체와 대상을 이어주는 데 있어서 기술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기술은 인간이 노동에 사용하는 도구의 총체를 말한다. 기술은 노동하는 인간의 동반자임은 물론이다.

기술은 인간의 노동을 수월하게 하며 또한 노동을 완성시키고 가속화시키며 증가시킨다.

기술은 생산물의 양을 증가시키며 때로는 품질도 향상시킨다.

그러나 때에 따라서는 기술이 인간의 적일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기계가 인간을 대체하는 경우, 기계가 만족을 앗아가 버리는 경우, 창조의 의욕을 박탈하는 경우, 그리고 기계 때문에 실업자가 생기는 경우, 고용을 감소시켜 인간을 기계의 노예로 전락시키는 경우가 그렇다.

성서의 말씀이

오늘날의 사회가 처한 상황에서 이해되자면 인간과 기술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자 할 것이 틀림없다:

"기계는 인간 지성의 산물이며 인간이 땅을 다스리는 도구이다."

최근에 들어서 적어도 일부 사회에서는 기술이 분명히 경제적 발달에 기본적인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이는 또한 노동에 대해 그리고 특히 노동의 주체인 인간에 대해 몇 가지 문제를 야기시켰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 사람이 다른 사람과 어떻게 관계 맺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이 문제들은 상당한 긴장을 안고 있다.

이는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들에 대해 답한다는 것은 국가와 정부에 대한,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조직에 대한, 국제기구에 대한, 그리고 역시 교회에 대한 만만치 않은 도전이 아닐 수 없다.

6. 인간

창세기가 말하는 것은 "하느님을 닮도록" 인간이 창조되었기 때문에 "땅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인간도 하느님처럼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자기 행동을 통해 생각하며 스스로 결정하고 만족을 추구하는 인격체라는 것이다. "땅을 다스리는" 노동의 과정을 통해서 사람이 무슨 일을 하고 무슨 활동을 하든 지간에 사람은 인간이 되어야 한다.

인간은 하느님을 닮도록 창조된 존재요, 따라서 인간이 된다는 것은 곧 "하느님을 닮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같은 주제는 사목헌장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인격체로서의 인간은 "땅을 다스리는" 노동의 세계에서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는 척도이다. 이는 모든 시대에 있어서 교회가 사회 문제를 가르치는 기본적인 진리이다.

고대 사회에서는 어떤 노동에 종사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을 계급으로 나누었다. 육체노동은 자유민에게는 하찮은 것으로 여겨져서 노예들에게나 맡겨졌다.

오늘날 산업화가 진행되고 있는 자본주의 시대에 와서도 노동의 종류에 따라서 사람들을 계급으로 나누는 관행은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사회에서는 노동하는 주체보다 노동을 더 우월하게 여기고 있다. 즉 노동 자체에 귀천이 구분되어 있다. 그러나 노동이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지 인간이 노동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

노동의 목적은 항상 인간인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의 평가는 노동하는 주체인 인간이 얼마나 인간성을 달성하느냐, "하느님을 닮을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노동 자체에 귀하고 천한 구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하는 주체가 얼마나 노동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느냐에 귀천이 달려 있다.

고대 사회처럼 육체노동을 한다고 천한 노동이 아니요 현대 사회처럼 돈을 많이 번다고 해서 귀한 노동이 아니다.

차라리 귀한 노동은 노동 과정에 속하는 일이나 활동을 통해서 얼마나 인격적으로 성숙할 수 있느냐, 얼마나 "하느님을 닮을 수 있느냐"에 따라 달라질 문제인 것이다. 노동을 통해서 사람이 인간이 되지 못하면 그 노동은 천한 것이다.

사람들에게 "땅을 다스리라"고 하느님께서 명하신 목적은 "하느님을 닮도록"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땅을 다스리는" 모든 노동이 "하느님을 닮기에" 이르지 못하고 비인간화로 전락한다면 이는 참으로 천한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도 목수로서 육체노동을 하셨다. 그리고 나서 복음을 선포하는 공동체 활동을 하셨다.

우리는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 곧 하느님을 닮은 분이라고 믿는다.

우리도 노동을 통해서 그분을 따라야 한다. 이렇게 볼 때 노동에 귀천이 없다는 말은 비현실적인 말이다.

그러나 육체노동을 한다고 해서 천하다거나 돈을 많이 벌지 못한다고 해서 천하다는 것도 틀린 말이다.

노동에는 귀천이 있다. 노동의 목적에 공헌하는 정도에 따라서 귀천이 정해진다.

스스로 비인간화를 초래하거나 정의롭지 못한 돈을 버는 노동은 천한 노동이다.

스스로 인간화를 이룩하거나 정의롭게 돈을 버는 노동은 귀한 노동이다. 이러한 뜻에서 "땅을 다스리는" 노동이 노동하는 주체로 하여금 "하느님을 닮도록" 하는 노동의 인간화가 달성된 사회는 "하느님 나라"라고 할만 하다.

여기서는 경제적 부로 측정하는 '계급'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계급 없는 사회'는 단순히 '가진 계급'(有産 階級.부르조아)이 없어진 사회라기보다는 천한 노동이 사라진 사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대판 노예로 불리우는 '못 가진 계급'(無産 階級. 프롤레타리아)을 천하게 만드는 '가진 계급'의 천박한 노동을 인간화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7. 거꾸로 된 현실

이러한 계시진리에 비추어 볼 때 현실은 거꾸로 되어 있다. 거대한 산업화가 진행되는 동안 노동의 목적은 외면된 채, 노동자가 노동력이라는 상품으로 취급되었다.

노동의 인간화가 아니라 천박한 노동의 역사가 확대된 것이다. '자본주의'는 유물론적이고 경제주의적인 비인간적 요소를 전면에 내세워 천박한 노동의 역사를 가속화시켰다. 이에 대한 역사적 대안으로 등장한 공산주의 역시 자본주의의 이러한 천박성을 이어 받았다.

그들도 노동을 인간화시키지 못하고 생산의 수단을 천박하게 만들기는 마찬가지이다.

자본주의적 세계관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자본'이라는 물질을 인간보다 우위에 놓는 유물론적인 세계관이다.

공산주의가 또한 그렇다. 자본주의적 산업화 방식은 또 어떤가? 그것은 인간의 노동을 생산의 수단으로 삼는 경제주의 방식인데, 공산주의가 또한 그렇다. 결국, 공산주의자들은 본질적으로는 자본주의적 세계관과 산업화 방식으로 자본주의를 개혁하려 하였다.

이는 역사적 오류가 아닐 수 없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대안으로 등장하기는 했지만 이러한 의미에서 본질적인 대안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오류들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노동은 물질과 동일시되어서는 안된다.

그래서 사실은 인간의 노동을 생산수단으로 취급하는 모든 노력은 그 계획이나 이름이 어떻든, 즉 미국과 일본, 서유럽 세계의 개인주의적 자본주의든 혹은 소련과 중국, 동유럽 세계의 전체주의적 자본주의든 간에 인격을 도외시한 유물론적 경제주의라는 점에서 '자본주의'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이러한 점들이, "하느님을 닮도록" "땅을 다스리라"는 말씀에 비추어 본 노동 문제가 다만 경제 문제가 아니라 윤리적인 문제이며 사회 문제의 핵심이 되는 이유이다.

모든 사회 경제 정책에 대해서도 위와 같은 방식으로 살펴 보아야만 한다. 개별 국가에 있어서나 국제적으로나, 특히 동서진영간, 남북관계의 긴장에 있어서 더욱 그렇다.

요한 23세는 회칙 [어머니와 교사]에서, 그리고 바울로 6세는 회칙 [민족들의 발전]에서 이 문제를 특별히 환기시킨 바 있다.

8. 노동자들의 연대

노동자들의 관점에서 노동 문제를 바라보는 데 있어서는 지난 90년 동안의 변화를 살펴 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노동하는 것은 언제나 인간이기 때문에 노동은 본질상 하나이지만 그 종류는 다양하기 때문이다.

산업이 발달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형태의 노동이 생겨나기도 했지만 어떤 것은 사라지기도 했다. 이런 일들은 으레 일어나는 것이라 해도 윤리적이고 사회적으로 위험한 요소들이 끼어들지는 않았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이 가운데 하나가 지난 세기에 일어났으니 바로 '노동자 문제' 혹은 '프롤레타리아 문제'이다.

이 문제는 노동자들, 특히 산업 노동자들이 돌발적으로 연대함으로써 야기된, 정당한 사회적 반발이었다.

노동자들, 특히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려는 산업현장에서 단조로우며 비인격화된 노동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에게 연대하여 단체 행동을 하라고 요청하는 것은 사회윤리적으로 볼 때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이는 노동의 주체인 인간의 지위 하락과, 임금착취와 비인간적인 노동 조건과, 그리고 빈약한 사회보장 제도에 대한 반발이었다.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급격한 산업화가 추진되던 시대의 노동자들이 하늘을 향해 복수를 요청하며(신명 24,15 ; 창세 4,10) 자기네들을 억누르던 부당하고 악랄한 체제에 대항하여 반발한 것은 사회윤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정당한 처사였다.

이 부당한 체제는 단지 자본가들에 의해서만 경제의 주도권이 강화되고 보호되는 사회경제 체제였고 노동자들의 권리에 대해서는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것은 인간의 노동을 생산의 도구로만 보았기 때문이며, 자본만이 생산의 유일한 기반이요 목적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노동자들이 자기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연대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으니 이에 따라 수정된 자본주의와 전체주의가 새롭고 다양한 형태로 발달하여 새로운 체제들이 생겨났다.

노동자들이 제한된 범위에서 경영과 생산관리에 참여하게 되었다. 노동자들은 노동 조건과 임금 그리고 노동자들에 관한 사회 입법에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제까지의 불의를 그대로 용인하거나 새로운 불의를 야기시키는 체제도 생겨났다.

보다 발달된 통신망으로 인해 전세계적으로 생활조건과 노동조건을 더욱 완전하게 알게 되었으나, 동시에 지난 세기에 노동자들을 연대시켰던 상황보다 더 불의한 상황이 다른 형태로 벌어지게끔 되었다.

이러한 사태는 산업화된 사회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아직까지도 농업이나 이와 비슷한 산업이 주종을 이루는 후진 사회에서도 일어났다. 노동자들의 이와 같은 연대 운동은 지금은 프롤레타리아로서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었음을 깨달은 사회 집단에게도 필수적인 것이다.

이러한 사회 집단 가운데에는 전문 기술인이나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지식인들도 포함될 것이다.

이 지식인들은 그들이 받은 교육이 사회의 요구에 부합되지 않거나 전문 교육을 요구하는 수요가 공급보다 적을 때나 혹은 보수가 적을 때 실업자가 된다. 물론 교육은 그 자체로 항상 가치 있는 것이고 인간의 인격을 풍요롭게 하는 중대한 요소이기는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산 계급화'의 위험은 가능성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노동자의 처지에 대한 연구가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전세계적으로 사회정의가 구현되려면 모든 노동자들에 의한, 모든 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새로운 행동이 필요하다. 이러한 연대 운동은 노동자들의 지위가 떨어지고 이들이 착취당하는 어디에서나 그리고 가난과 굶주림이 있는 곳, 어디에서나 마땅히 있어야 한다.

노동자들의 처지에 대한 연구, 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연대 운동 그리고 가난과 굶주림과 착취를 없애기 위한 사회정의 구현활동, 이렇게 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요, 그리스도께 대한 충실성의 증거이며, 그래야만 진정으로 '가난한 이들의 교회'가 될 수 있다.

사람들을 가난하게 만드는 원인은 무엇인가?

실직을 당하거나, 부당하게 낮은 임금을 강요당하거나, 노동자 자신과 그 가족의 부양을 보장하는 귄리를 박탈당하여, 노동의 존엄성이 침해당했을 때 사람들은 '가난하게' 된다.

9. 노동하는 인간의 존엄성

이제 창세기의 말씀을 염두에 두고 '인간 노동'의 존엄성, 참으로 인간적인 노동의 존엄성, 즉 노동하는 인간의 존엄성에 관련된 문제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비록 사람이 하느님과의 계약을 깨뜨리고 "이마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먹으리라"(창세 3,19) 하는 말씀을 듣게 되었어도 하느님을 닮은 존재로서 '인간'이 되도록 창조된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본래 의도는 거두어지지 않았다.

이는 비록 노동이 힘든 고통을 수반하기는 하지만 그 노동을 통하여 인간이 땅을 다스리도록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느님과의 계약에 충실하다면 힘든 고통 없이도 기쁜 마음으로 노동을 할 수도있다.

노동의 인간화가 그것이다. 공동체적인 노동은 고통을 기쁨으로 만든다. 그러나 노동을 생산수단으로 만들어 비인간화시킴으로써 하느님과의 계약을 사람들이 위반했어도 그래서 노동의 기쁨이 사라지고 힘든 고통이 노동에 뒤따른다고 해서 노동의 인간화라는 노동의 목적이, 그리고 노동하는 인간의 존엄성이 없어진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가능성은 아직 남아 있다.

단지 가능성이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노동을 인간화해야 할 사명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교회에 주어져 있다. 이것이 노동에 관한 하느님의 뜻이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질서를 회복해야 할 책임이 교회에 맡겨져 있다. 사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가능성이 더욱 커졌다고 말해야 한다.

노동의 관점에서 볼 때

비인간화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고통받는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심으로써 그분은 노동의 인간화로 가는 길을 가르쳐 주셨고 바로 그 길 때문에 세상에 오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노동의 인간화에 있어서도

그분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다."(요한 14,6) 노동의 고통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다. 노동의 고통은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친숙하다 :

땅을 가꾸는 농부들, 광산이나 채석장에서 일하는 인부들, 뜨거운 용광로 앞에서 일하는 제련공들, 주택이나 건설현장에서 부상과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노동의 고통은 아주 익숙한 것이다.

또한 정신노동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노동의 고통은 익숙하다 : 학자들은 물론이요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결정을 내릴 책임이 있는 사람들에게 노동의 고통은 익숙하다.

그리고 밤낮으로 환자들의 병상을 지키는 의사와 간호사들에게도 노동의 고통은 익숙한 것이다. 자신들의 역할에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면서도 가정과 자녀 양육의 책임과 매일매일의 무거운 짐을 지는 여성들에게도 노동의 고통은 익숙해 있다.

이러한 노동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노동은 인간을 위해 좋은 것이다. 지금 당하는 고통이 즐겁기 때문에 좋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표현하고 향상시키므로 좋은 것이다.

사람은 노동을 통해서 "땅을 다스릴" 뿐 아니라 보다 더 인간답게 됨으로써 "하느님을 닮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성, "땅을 다스림"으로써 "하느님을 닮아야 할" 인간의 존엄성을 위협하는 나쁜 가능성이 남아 있다.

그것은 비인간화된 노동의 현실이다.

집단 수용소에서 강제노동이라는 형벌로 사람들을 처벌할 수 있으며, 정당한 임금을 주지 않음으로써 사람을 압박하고 착취하는 수단으로 괴롭힐 수도 있다.

이것은 천한 노동이요 천한 노동 현실이다. 여기서는 열심히 일할 수 없다. 천한 노동 현실 속에서 열심히 일하라고 하는 것은 사람을 더욱 천하게 만들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근면의 덕을 이야기할 때, 비인간적인 노동의 현실 속에서도 무조건 열심히 일하고 말할 것이 아니라 사람을 인간답게 하고 인간성의 격하를 막을 수 있는 노동의 사회적 질서를 아울러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의 도덕적 관습으로서 사람을 인간으로서 선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열심히 일하는 근면의 덕이 권장되려면 일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일터의 구조가 선해야 한다.

노동이 천하지 않고 귀하게 되려면 노동하는 사람 자신이 귀하게 될 수 있는, 그래서 인간의 존엄성에로 나아갈 수 있는 사회적 질서가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노동의 고통을 노동의 기쁨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인간화된 노동의 사회적 질서가 필요하다.

10. 노동과 사회 : 가정과 국가

노동이 노동하는 각 개인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이렇게 확인했으니 이제 다른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살펴 볼 차례이다.

노동은 가정생활의 기반의 하나이며, 가정은 노동으로 벌어들이는 수입으로 유지된다. 노동은 가정교육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노동이 사람을 인간답게 하는 바, 교육의 주요 목적이란 사람을 인간답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가정은 노동의 윤리적 질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들 중의 하나이다. 이는 교회가 늘 강조해 온 것이다. 동시에 가정은 노동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는 공동체이자, 노동을 배우는 최초의 학교이기도 하다. 가정 뒤에는 국가라는 더 큰 학교가 있는데, 각 개인이 가정 안에서 흡수하는 가치는 어떤 특정 국가의 문화이기 때문에 국가는 간접적으로 모든 개인에게 위대한 '교육자'이다.

뿐만 아니라 국가란,

모든 세대에 걸쳐 행해 온 노동이 역사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구체화된 열매이다. 그래서 개인은 자신의 내면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인간성과 한 국가의 구성원으로서의 소속감을 동일시하게 되고 자신의 노동으로 동료들과 함께 국가 사회의 공동선을 도모하게 된다.

그리하여 노동이 전인류,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유산을 늘리는 데에 기여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개인, 가정, 그리고 국가는 인간의 노동에 있어 그리고 노동하는 사람 자신에게 있어 항상 중요하다.

개인과 가정과 국가가 모두 인간화될 때, 노동으로 "땅을 다스리는" 것이 된다. 그러자면 가정과 국가라는 노동의 현실에서 노동하는 사람 자신이 인간의 존엄성을 이룩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듯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노동보다도 노동하는 사람 자신이지만, 노동은 노동자보다도 우선되지 않는 한,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을 해치지 않는 한, 좋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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