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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노동에 관한 회칙 [노동하는 인간]    3
존경하는 형제들과 사랑하는 아들 딸들에게
인사드리며 사도적 축복을 보내는 바이다
교황 요한 바울로 2세의 사회회칙

제3장 노동과 자본의 갈등

11. 무엇이 갈등인가

산업이 발달하기 시작한 이래 노동 문제는 '자본'과 '노동'의 갈등으로 표현되어 왔다. '자본'과'노동'의 갈등이란 생산수단을 소유한 소수 자본가 집단과 오로지 노동만을 통해서 생산에 참여하는 노동자 대중과의 대립을 말한다.

이 대립은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힘을 자본가들의 손아귀에 맡긴 반면, 이 자본가들은 최대의 이윤을 얻으려고 할 수 있는 한 싼 임금을 노동자들에게 주려고 한 데서 시작되었다. 물론 형편없이 싼 임금 말고도 다른 착취 방법이 있었다.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노동 환경이라든지, 노동자의 건강이나 그 가족의 생활 조건이 보장되지 못하는 노동 조건이 그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계급 투쟁으로 보기도 한다. 즉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인 자유주의와 과학적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데올로기로서 세계의 노동자 계급을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마르크스주의와의 이데올로기 투쟁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자본과 노동 사이의 갈등은 조직적인 계급투쟁으로 바뀌어 단지 사상적 이념으로서 뿐만 아니라 주로 정치적 수단으로서 이용되었다.
이러한 갈등의 역사는 잘 알려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에 따르면 계급적 불의를 없애고 나아가 계급 자체를 없애는 유일한 길은 계급 투쟁뿐이라고 한다. 그리고 계급 투쟁의 과정은 개인 소유가 되어 있는 생산수단을 사회 전체의 소유로 함으로써 인간의 노동을 착취로부터 보호하는 생산수단의 집단화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혁명을 포함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권력을 독점하여 생산수단의 사유를 배제하고 집단소유 체제를 도입하고자 한다. 그들의 이러한 계획의 목적은 사회혁명을 일으켜 사회주의를 도입함으로써 결국은 전세계를 공산주의 체제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이 문제를 세세한 구석까지 다룰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너무나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엽적인 문제보다는 차라리 이 회칙의 주제인 인간 노동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로 되돌아가도록 하자.

인간 노동의 문제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노동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것들을 고려할 때 비로소 설명될 수 있음을 아울러 명심하도록 하자.

12. 노동이 자본보다 중요하다

우리가 고려해야만 할 것 중에는 사람들에 의해 야기된 수많은 갈등과 기술의 기능 문제가 있다. 기술이 발달한 나머지 전세계를 파멸시킬 수도 있는 핵전쟁의 가능성까지 생긴 점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가 고려해야만 할 것은 노동이 자본보다 더 중요하다는 원칙이다.

노동은 생산의 원인이지만 자본은 생산의 도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느님을 닮도록 땅을 다스려야 한다는 성서의 말씀은 땅에 있는 모든 자원이 이를 위해 인간에게 맡겨진 것임을 뜻한다. 이 자원들은 오직 노동을 통해서만 인간에게 봉사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인간은 이 자원들의 작은 일부를 소유하는 것이다.

인간은 노동을 통하여, 노동을 위하여 자원을 소유한다. 인간이 노동을 통해 생산수단이든, 기술이든 무엇을 더 보태든지 간에 그 시작은 인간이 창조해 내지 않은, 땅의 자원이다.

인간은 이미 마련된 자원을 발굴해 내는 것이지 창조해 내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이미 마련된 자원을 발굴함으로써 노동을 통한 생산과정에서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을 뿐이다. 인간 노동의 한 처음에는 언제나 이러한 창조주 하느님의 선물이 있다. 이 점은 인간 노동이 자본보다 앞선다는 우리의 신념을 뒷받침해 준다.

자본은 땅의 자원이기도 하고 자원을 이용하기 위하여 노동에 의해 창조된 것이기도 하다.

가장 단순한 도구로부터 최첨단의 기술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산수단은 인간 노동에 의해 창조된 것이다. 도구로서 노동에 봉사하는 모든 것은 노동의 결과인 것이다. '자본'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거대한 생산도구의 총체를 인간이 잘 이용하기를 바란다면 이를 발명하고 계획하고 만들고 완전케 한 인간의 '노동'에 대하여 잘 알아야 한다.

이는 효과적으로 생산에 참여하는 데 있어서 인간이 노동의 실질적인 주체라는 점, 그리고 자본이라고 하는 생산수단의 총체가 아무리 완벽하다고 해도 결국은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결코 잊어버림 없이 더욱 더 치밀한 준비와 무엇보다도 적절한 훈련을 통해 '노동 능력'을 키우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회가 언제나 가르쳐 온 대로 인간은 사물에 앞서며 자본은 그저 사물의 집합체에 지나지 않음을 강조하고자 한다.

13. 인간보다 재화를 앞세움 : 경제주의와 물질주의

위에서 말한 이 진리에 비추어 우리는, 자본이 노동에서 분리될 수 없으며, 결코 노동이 자본에 대립되거나 자본이 노동에 대립될 수 없고, 더구나 자본가와 노동자가 서로 대립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명백히 알게 된다.

올바른 노동제도는 자본과 노동 사이의 대립을 극복할 수 있으며, 노동자가 어떤 노동에 종사하든 지간에 노동에 대한 노동자의 주체성의 원칙과 노동이 진정으로 자본에 앞선다는 원칙을 준수할 수 있는 노동제도를 말한다.

노동과 자본 사이의 대립은 생산과정의 구조나 경제과정의 구조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대립은, 인간을 노동이나 자본보다 우위에 놓지 않는, 노동과 자본에 대한 잘못된 생각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이 잘못된 생각을 경제주의 또는 물질주의라고 부른다. 이 오류를 차근차근 살펴보자. 사람은 어떤 일을 하든지 두 가지 유산을 물려받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하나는 하느님께서 온인류에게 마련해 주신 자연자원이요, 또 하나는 다른 사람들이 이 자연자원을 토대로 노동하여 발달시켜 놓은 기술과 도구이다.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유산은 자연자원이요 이웃이 마련해 준 유산은 기술과 도구인 것이다. 사람은 오로지 창조주 하느님(자연자원)과 다른 사람들의 노동(기술과 도구)에만 의지할 뿐이다.

이로써 사람은 "땅을 다스리는" 노동을 하게 된다는 것을 지성과 신앙으로 깨닫게 된다. 이에 비해 자본과 다른 생산수단은 인간의 노동에 영향을 끼칠 수는 있어도 예속시킬 수는 없다. 이렇듯 노동 문제를 인간 우위의 관점에서 일관성 있게 설명하는 방식이 어언 간에 도전 받아 왔다. 자본과 노동을 둘 다 똑같이 생산의 비인격적인 힘인 양 서로를 대립시키는 경향이 그것이다.

이를 일컬어 '경제주의'의 오류라고 한다. 인간의 노동을 경제적인 기준으로만 따지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물질주의'의 오류라고도 일컫는데, 그것은 인격적인 것보다도 물질을 더 앞세우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천적이고 통속적인 물질주의에서 출발하여 사람들은 유물론적 철학을 발달시켰고 마침내는 변증법적 유물론에까지 이르렀다. '변증법적인' 형태에서조차도 유물론은 자본이나 재화보다 인간을 우위에 놓는, 인간 노동에 관한 올바른 견해를 내놓을 수는 없었다. 유물론에서는 인간이 노동의 주체로서 그리고 생산의 원인으로서 인정되지 않고 오히려 생산조직의 일부, 또는 결과로서 취급될 뿐이다.

그런데 생산의 또 다른 요소인 것처럼 노동을 다룸으로써 노동을 자본과 대립시키는 모순은 원래 공산주의 철학이나 경제이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자본과 노동의 모순은 산업화가 진행되던 초기 자본주의의 경제 사회적 모순에서 생겨났다.

이때는 경제적인 부를 늘리는 데만 급급하고 산업화의 목적이요 주체인 인간은 산업화의 수단처럼 취급되던 때였다. 이리하여 노동자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게 되었고 따라서 정당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음은 위에서 말한 바 있다.

경제적인 부를 늘리는 것만이 제일 중요하다고 사람들이 생각한다면 언제든지 이와 똑같은 과오가 되풀이해서 저질러질 수 있다. 이같은 과오를 극복하는 유일한 길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을 바꾸는 길이다. 일하는 방식을 바꾸는 길이다.

그래서 인간이 재화보다 우위에 서고 인간의 노동이 자본보다도 더욱 우위에 있게 하는 길이다.

14. 노동과 소유

인간보다 재화를 앞세우는 오류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전세계적으로 널리 퍼져 나가고 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관점에서 보다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소유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노동과 자본의 대립을 말할 때 우리는 생산의 비인격적인 힘으로만 다루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 힘 뒤에 있는 인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생산수단을 지니지 못하고 일을 하는 노동자들과 생산수단을 소유하거나 소유자들을 대변하는 자본가 또는 경영자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노동과 자본이 대립되고 있는 현실구조는 정확하게 말하자면 소유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과 소유하고 있는 사람 사이의 대립인 것이다.

사유재산 소유권과 생산수단 소유에 대한 교회의 일관된 가르침은 마르크스주의가 주창하였고 지난 90년간 많은 나라들이 받아들였던 전체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또한 교회의 가르침은 자유주의가 주창하는 자본주의와 그로부터 생겨난 정치체제와도 다르다.

자본주의의 경우, 소유권을 이해하는 방식에서 차이가 난다. 그리스도교의 전통에서는 소유권이 절대적이고 침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재화가 모든 이를 위한 것이라는 뜻에서 모든 이를 위해 소유권이 행사되어야 함을 가르쳐 왔다.

더구나 소유권을 주장하기 위해서 사회적인 분쟁까지 일으킬 수는 없는 것이다. 재산은 노동에 기여하기 위하여 노동을 통해 얻어지는 생산수단이다. 생산수단을 개인의 재산으로 독차지하여 '노동'에 대립되는 '자본'의 형태로 만들거나

더구나 노동을 착취하려고 한다면 이는 바로 수단과 목적을 뒤바꾸어 놓는 것이다. 생산수단이 노동을 거슬러 소유되거나 한갓 '소유를 위해' 소유될 수는 없다. 소유권의 정당한 명분은 개인 소유권이든, 공공 소유권이든, 집단 소유권이든 간에, 오로지 노동을 위해서만 기여해야 한다는 점이고, 노동에 기여함으로써 재화의 보편적인 목적과 재화의 공동 사용권을 성취시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적당한 상황에서는 어떤 생산수단의 사회화(공동 소유)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노동 헌장]이 반포된 이래 교회는 이같은 가르침을 항상 상기시켜 왔는데, 이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에서부터 뒷받침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볼 때 생산과 경제에 있어서 인간을 최우선 순위에 놓는 교회의 가르침을 확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생산수단의 소유가 배타적인 권리라고 일종의 '신조'처럼 옹호하고 있는 극단적 자본주의의 입장은 여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확실히 자본은 지나간 세대들이 노동한 결과이며 동시에 자본은 모든 생산수단의 도움으로 이루어지는 노동에 의해 끊임없이 창조되는 것이다.

이상의 내용에 비추어 볼 때 가톨릭 교회의 전문가들과 주교들과 교황이 내놓은 다음과 같은 제안들은 의미 깊은 것이다. 즉, 노동자들이 기업경영 또는 이윤배당에 참여한다든지, 노동에 의한 주식 소유 등 '노동수단의 공동 소유'를 위한 제안들이다.

이런 제안들이 구체적으로 적용될 수 있든 없든 노동의 우위를 보장하기 위해서 생산수단의 소유권을 노동자가 자본가와 경영자와 함께 공유하거나 적어도 자본가의 권리를 제한해야 함은 명백하다.

이는 오늘날 제3세계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더욱 분명한 진리이다.

인권이 존중되기 위해서는 '극단적인' 자본주의의 입장이 계속해서 수정되고 개혁되어야 하지만, 이 개혁이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없애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소유자의 손에서 생산수단(자본)을 빼앗아 국가에 넘겨준다고 해서 생산수단의 사회화가 충분히 보장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의 이름으로 생산수단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자본에 대한 노동 우위의 원칙에 따라 제대로 임무를 수행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이 생산수단의 관리를 마음대로 독점하고 심지어는 기본 인권의 침해까지도 서슴지 않아 그릇되게 임무를 처리할 수도 있다.

따라서 전체주의 체제에서 행하는 단순한 생산수단 국유화는 여기서 우리가 말하고 있는 생산수단의 사회화와 전혀 다르다.

진정한 사회화란 각자가 자신의 노동을 기반으로 하여 다른 모든 사람과 함께 하는 커다란 일터에서 자신도 한 사람의 소유자라고 온전히 생각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할 수 있는 한 노동이 자본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이며, 또한 경제, 사회, 문화적인 목적을 지닌 광범위한 중간 집단을 창조하는 일이다.

이러한 중간 집단들은 정부로부터 진정한 자율성을 누려야 하고, 공동선을 위하여 행동해야 한다.

또한 이 집단들은 자기 집단의 구성원들이 인격체로서 대우를 받고, 그 집단의 활동에 적극 참여하도록 격려 받아야 한다는 뜻에서, 그야말로 살아있는 공동체들이 되어야 한다.

15. 노동의 인격적인 가치

노동하는 인격체는 정당한 보수를 받기를 원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위해' 노동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 느낌은 극단적인 관료체제 하에서는 사라져 버린다. 왜냐하면 보이지 않게 뒤에서 조종되는 기계의 부속품에 지나지 않음을 노동자가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노동은 경제와 관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특히 인격적인 가치에도 관련되어 있음을 교회는 항상 가르쳐 왔다. 이러한 인격적 가치가 존중될 때 생산성이 높아지고 경제가 발전한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 따르면,

이것이 바로 생산수단의 사유권이 정당화될 수 있는 첫째가는 이유가 된다.

우리 시대에도 소유권의 형태는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으므로 이유 있는 예외를 인정할 수는 있겠지만,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한 인격적인 가치는 경제에 있어서도 원칙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여전히 중요하다.

사회화가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이러한 인격적 가치의 중요성을 존중함으로써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위해' 노동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도록 보장해 주어야 한다. 만일 이러한 노력이 기울여지지 않는다면, 경제 전반에 걸쳐 헤아릴 수 없는 피해가 불가피하고, 경제적 손실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에 대한 폐해를 가져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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